메르스는 인재(人災)인가, 천재(天災)인가?

<서울시에서 간행하는 서울사랑(love.seoul.go.kr)에 실린 원고입니다. 초고이니 아마 편집이 좀 되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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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혹은 전염병)에 걸리면 세계의 적대감을 말그대로 몸소 경험하게 된다. 병에 걸리면 우리 몸이 정말 아프다. 아픈 우리는 죽음을 직감하고 두려워하게 되며, 죽음을 피할 방법을 찾게 된다. 병에 걸린 사람은 사회적으로도 아프다. 감염병이, 메르스가 특히 그랬는데, 어느 사람을, 어떤 경로로 찾아갈지 알아낼 방법이 없기에 병에 걸린 사람은 위험하다. 그래서 병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스스로 거리를 두기도 하고 강제로 격리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은 생각보다 심각하게 아프다. 일상적인 대화와 몸짓이 보통의 생명을 위해 얼마나 필요한지 격리된 사람보다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없는 사회에 생기는 빈 자리는 그 사람의 자리보다 더 크다. 생각해 보자. 만약 이렇게 아픈 사람이 국민의 5%, 10%가 된다면 한 사회가 기능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감염병 대책은 모든 국가의 중대한 책무였고 근대 국가가 수립한 공중보건체계는 위대한 성취였다. 공중보건은 국가가 감염병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역량을 동원하여 감염병을 예방하고 발생한 감염병의 해결을 위해 취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근대국가의 폭력성이나 공중보건조치에 내재한 강제성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감염병이 발생하였는지 감시하고, 병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확산되는지 조사하며(역학조사), 환자를 치료하고, 확산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격리와 소독과 같은 수단을 활용(방역대책)하는 동시에 사회와 소통하고 불필요한 영향을 최소화하는 조치가 공중보건이 하는 활동이다. 이런 활동이 가능하도록 인력과 재정을 확보하고, 그리고 권한의 범위와 한계를 설정해 두는 일도 이 공중보건의 활동에 포함된다.

먼저 작년에 서아프리카를 강타했던 에볼라감염병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에볼라감염병 보도에서 먼저 기억나는 것은 우주복 같은 방호복이고, 그때 우리는 ‘이렇게 무섭구나’, ‘의학기술이 이렇게 정교하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조금 후 에볼라 치료제를 시험한다는 기사와 에볼라 감염병에 대처하기 위해 애쓰다 자신이 감염된 의료인과 그들을 둘러싼 휴먼스토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먼 곳의 이야기여서 이런 기억만 있는 것이다. 에볼라감염병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경험과 이들과 함께 분투했던 공중보건활동가들의 밋밋한 이야기는 우리가 들을 수 없었다. 이들은 치료제도 없이 가장 고전적인 방법(물론 고도로 정교화 된, 그렇지만 역시 고전적인 역학조사와 격리)만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고 설득하며 싸웠다. 에볼라는 아직도 감염자가 생긴다고 하지만, 이제 그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우리는 사스와 신종플루와 같은 병, 에볼라와 비슷한 이야기를 기억한다.

이제 메르스로 돌아가보자. 메르스 대책보다 메르스 감염병으로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메르스 병으로 인한 신체적 아픔, 죽음의 공포와 실제 닥친 죽음, 그리고 뒤따른 사회적 격리를 충분히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접촉자로 격리된 사람도 포함되어야 한다.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공감이 시작이 되어야 한다. 위기앞에서의 공감과 연대의식이 한 사회가 건강하다는 증거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공감할 줄 몰랐다. 신상을 캤고, 넘겨짚어 아이들을 학교에 오지 못하게 했고 희생자를 가해자로 오해했다. 한가지만 더, 의료진을 영웅으로 만들지 말고 존중하는 일이 필요하다. 의료진과 방역당국에 대한 신뢰가 희생이나 대단한 지적 능력, 치료법의 개발 같은 기대가 되지 않아야 한다. 의료진이 정치가 아니라 방역과 공공의 보건만을 판단의 가치로 삼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공간을 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메르스는 천재다. 쉽게 잊고 지내지만 이 세계는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비는 필요한 때 내리지 않고, 혹한과 혹서, 또는 황사 때문에 숨쉬는 일도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다. 병충해는 벼와 과실을 위협하고 숲의 나무를 고사시킨다. 인간은 그래서 조상의 음덕과 전능자의 보살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은 문명의 발전으로 훨씬 안전하게 지내게 된 것처럼, 자기를 직접 책임지고 보호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일은 사회를 보호하는 제도와 수단이 발전한 정도다. 우리 사회의 안전을 보장하는 제도는 정교화되었고 우리 일상에 깊이 파고 들어 깊이 들여다 보지 않으면, 파악되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를 둘러싼 적대적인 세계를 잊어도 될만큼 안전해졌다는 말인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회가 보장하는 안전은 기술과 지식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고 이 구조물이 서있는 기반과 유지하는 뼈대는 불완전한 기술, 지식,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지난 한달여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흔든 메르스 사태가 드러냈다.

재난은 한 사회의 취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제도가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재난은 인재라고 하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메르스는 우리 사회의 취약함을 드러냈고, 국민 모두가 보호받지 못하고 있음도 알게 했다. 이제 메르스가 지나면 우리 사회를 복구하는 일이 남는다. 제도개선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것이다. 이 개선이 우리가 신뢰하는 전문가들에게 자율성의 공간을 부여하도록, 그리고 모든 시민들을 그 보호의 대상으로 삼도록, 그리고 사람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이루어지도록 주의깊게 감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