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왜 나쁜가

# 들어가는 말

죽음에 관련된 다양한 현상을 연구하는 타나톨로지(thanatology)라는 학문분야가 있다. 죽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타나토스(thanatos)를 뿌리로 한 신조어다. 우리나라에도 관련된 연구자들이 있는데, 학문 분야에 붙일 적절한 우리말 번역어가 없어서 죽음학, 생사학(生死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고, 그냥 타나톨로지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연구자들이 있음에도 이들이 모두 인정해야 할 것은 죽음 자체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죽음학에 관한 많은 연구는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두려워하고 어떻게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과 친지들이 어떻게 그 슬픔을 표현하여 나누며, 결국 극복해내는가에 관한 것이다. 흥미로운 분야이지만 정작 죽음 자체에 대해선 해 줄 별다른 이야기가 없는 셈이다. 죽음에 관해서 무슨 말을 덧붙인다고 해도 믿음, 추측, 사변에 불과한 것이고, 기껏 인간이 죽음에 관해서 할 수 있는 말이란 죽음을 둘러싼 현상에 제한되어 있을뿐이다.

## 죽음이 아니라 죽음과 죽어감이다.

죽음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사실 없다. 죽은 사람과 이야기 나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죽은 후에 어떤 경험을 하는지- 염라대왕이 있는지, 요단강을 건너는지,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또 죽은 사람은 어떻게 바뀌는지도 알 수 없다.
아니, 우리는 죽어버린 사람의 신체가 어떻게 변하는지는 알고 있다. 또 죽음을 앞둔 몸은 어떻게 변하는지도 알고 있다. 오늘날 죽음에 관한 논의는 죽음을 앞둔 몸의 변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심장 박동, 호흡, 뇌의 기능과 다른 신체의 변화 중에 중요한 것을 찾아내고 어떤 변화가 죽은 사람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의학에서는 심장 박동이 멎고, 숨을 쉬지 않으며, 뇌의 기초적 기능이 없어진 상황을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뇌사나 심장사에 관한 논의는 어떤 변화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죽음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죽었다고 판별하는 일은 죽음을 둘러싼 변화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있는 심장, 허파 그리고 정신의 기능이 없어지는 것으로 죽음을 정의하지, 죽은 사람에게 생기는 일로 죽음을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구체적인 대상에 관한 이야기일 수 없다. 대신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죽어감에 관한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심장 박동과 숨이 멎는 일, 뇌가 제 기능을 잃는 일은 죽어가는 과정 중에 생기는 일이며, 이것은 의학이 알고 있다.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죽어감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돌보는 사람도, 죽은 사람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감과 죽음을 구별해서 생각해야 한다.

# 죽음에 관해서 – 죽음은 왜 나쁜가?
죽음 그 자체가 나쁜지 좋은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의식이 있는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회피한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모든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변화에 들어서는 관문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종교적 가르침이 이런 점을 지적한다. 출산을 앞둔 여성이 산고(産苦)를 두려워하지만 아이를 안는 기쁨으로 보상을 받는다고 지적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라.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음으로 죽음이 좋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죽음의 순간 이후에 관한 소망을 고백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죽음은 좋은가 나쁜가? 죽음에 관한 우리의 가치판단도 죽어감(dying)이라는 맥락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삶을 누릴 수 없게 되면 나쁜 경험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죽음이 나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 가능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1)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갖춘 모든 사람들이 싫어한다, (2) 신체가 부패하고 소멸한다, (3) 지금 누리는 것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다. 이밖에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는다 (지옥에 간다)도 생각할 수 있지만 심판이란 (최선의 해석으로 보아도) 일종의 자연법칙이니 좋고 나쁘다는 평가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일단 세 가지 가능한 이유를 하나씩 살펴보자.
## 다른 사람들도 싫어한다.
어떤 판단을 내릴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예를 따르는 것은 보통 안전한 일이다. 하물며 죽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에서야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더욱 그럴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고, 그 사람들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건대 죽음은 고통스럽고 나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앞둔 많은 사람들은 의식이 흐려지면서 헛것을 보는 섬망(delirium)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하며, 숨쉬기 어려워져 큰 소리를 내는 독특한 호흡을 하거나,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죽음을 앞두고 경험하게 되는 현상 때문에 그 끝에 있는 죽음도 나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게 합리적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들은 죽음에 관해 아무 것이라도 알고 있는 것이 있나? 중요한 문제라고 그래서 더 신중해야 한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한 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최근의 임사체험 보고, 죽음을 담담하게 마주하는 이들의 모습은 죽음이 정말 나쁘기만 한 것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이런 사례는, 비록 예외적이지만, 죽음이 좋은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가?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한 태도로 죽음이 나쁜지/좋은지 판단하는 일은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닐 수도 있겠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싫어한다는 것은 죽음이 나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수는 있겠지만, 죽음이 나쁜 이유는 되지 않는다.

## 신체가 부패하고 소멸한다
부패하여 소멸하는 육체만큼 죽음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이 있을까? 육체가 사그러지는 과정에서 육체의 주인이 살며 누렸던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열정과 성취도 함께 잊혀진다. 그래서 종교적 가르침은 썩어 문드러지는 육체를 그려 모든 일이 영원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도 죽음을 두려워할 좋은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렇게 드러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몫이지 죽은 사람의 일은 아니다. 죽은 사람의 직접적인 경험이 아닌, 주변 사람의 두려움과 상실감으로 죽음 자체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답변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어떤 종교는 살아서 했던 모든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순간이 온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신체의 부패가 죽음을 나쁜 무엇으로 만든다면, 죽은 후에도 살아있던 시기에 누리던 종류의 신체를 필요로 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 가정을 유지하기란, 죽음 후의 세계를 믿는 사람에게도 어렵다.
신체가 부패하고 소멸하는 것이 죽음의 경험의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가르쳐준다. 오랜 가르침들은 인간의 본질을 정신적인 것에서 찾았다. 그것이 영혼일지, 이성과 합리성인지, 아니면 뇌가 만들어낸 다른 무엇일지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신체가 인간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아니, 신체는 인간에게 있어 제한된 일부분일지도 모르겠다.

## 좋고 (나쁜) 경험을 누릴 수 없게 된다
인생은 고해(苦海)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례는 없는 것 같다. 사람은 불만이란 있을 수 없는 조건에서도 불행할 재능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나쁜 경험은 좋은 경험으로 극복되거나, 잊혀질 수 있는 것이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고통도 그 시간이 지난 후 우리를 맞아 줄 무엇에 대한 기대로 극복해 낼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은 기대의 종결을 의미한다. 적어도 우리가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종류의 경험은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아무런 경험이 없는 인간이 무엇인지 우리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죽음이 인간에게서 앗아가는 경험의 가능성이 죽음을 나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일 수도 있겠다. 경험할 능력을 잃는 것은 지금껏 살펴본 후보 중에서 유일하게 죽은 사람에게 생기는 일이다.
인간은 경험과 그 경험에 관한 기억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한 번 살펴보자. 지금의 내가, 비록 그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인격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 아닌가? 사실 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역할에 맞추어, 때로는 갑자기 생겨난 선의(善意)나 심술 때문에… 태도가 변하고 판단이 변한다. 우리 신체는 어떤가? 몸을 구성하는 원자 중에 태어나던 순간부터 가지고 있던 것은 얼마나 될까? 이렇게 허술한 인간 존재를 하나로 엮는 것은, 인간 종이 물려주는 DNA의 기억, 내가 스스로 쌓은 삶의 기억, 신체가 기억하는 내 습관과 반응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태어나던 시점으로 돌아가도, 여전히 나다. 그것은 내게 생긴 일을 내 일로 느끼고 반응하는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 아니 살아있기 때문에 그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은 그 경험을 앗아간다.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은 경험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내 경험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되어 생긴 반응이다. 지금의 고통이 지난 후 나를 찾을 가족의 따스한 손길,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우는 음식의 포근함, 이런 쾌락을 기대할 내 기억이 없어진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다. 죽음이 나쁘다면, 삶의 허약함과 찰나성, 자연의 불공평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모두가 갈구하는 좋은 경험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천국을 신앙하는 사람이라도, 그와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는 이별하는 것이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경험이 이제는 끝났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유물론을 신봉하는 이들은 죽은 인간은 더 이상 느낄 것이 없으니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로마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런 관점이 존재했고, 우리 머리는 이 지적에 동의한다. 가슴은 거부하지만. 그러나 이들도 죽음 자체가 좋은지 나쁜지에 답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죽어버린 사람은, 유물론의 관점에서, 나쁘고 좋은 것을 알 수 없겠지만 그 사람도 경험의 가능성을 잃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즉 그에게도 죽음은 나쁜 것이다. 죽은 후에 가능성의 상실로 고통을 당하는지 여부는 다른 문제다. 죽음의 순간 닥치는 가능성의 상실이 문제다.
그리고 경험의 가능성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경험의 질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 누구도 나쁜 경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라. 나쁜 경험이 혹시라도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이후에 따르는 깨달음에 관계된 것이다. 혹은 나쁜 경험에 연관된 의미있는 경험 – 분만의 고통을 들었다-과 관련된 것이다. 만약 나쁜 경험이 더 나쁜 경험으로 연속될 뿐이라면, 그런 경험의 상실 때문에 죽음이 나쁘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보다 나쁜 상항이 있을 수 있음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