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ormed consent: 진정성에 대해서

우주를 한자로는 宇宙라고 쓰고 하늘로 뜻을 붙인다. 이 개념을 영어로 번역하면 the universe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정관사 ‘the’에 관심을 갖는다. the 가 붙는 순간 누구라도 알고 있는, 그리고 확정된 대상이 된다. 그렇게 universe는 누구라도 알고 있는 공동의 대상이 된다. 이 하나의 단정적인 우주는 동시에 한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이 세계를 보는 단 한가지 시선, 누구라도 알 수 있고, 공유할 수 있으며, 기준이 되는 그런 우주.

 

그러나 이 세계를 보는 시선은 하나일 수 없다. 내 은사와 길을 걷다가, 한국에만 있을 법한, 다리가 없는 걸인을 만난 일이 있다. 그는 걸인이 보는 세계의 높이를 동정했다. 그를 보는 시선과 그의 시야, 아마 다리만이 보일, 그리고 뒤따르게 될 궁핍한 세계. 그의 세상은 두 발로 걸어다니는 사람의 세계와 다를 것이다. 병에 걸렸거나, 빚이 있거나, 도덕적인 문제에 봉착했거나… 세계는 제한되고, 우리는 다른 세상을 보고 경험한다. 그게 그의 우주다. 예컨대 우주는 하나가 아니고, 개별의 우주, a universe로 존재하고 있으며, 인간의 관계는 universe’s의 세계인 것이다. 이미 우리는 물리학에서도 그런 다양한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

김훈은 젊은 의사와의 만남을 이렇게 한탄한다.
“나이를 먹으니까 병원에 갈 일이 점점 많아진다. 눈도 침침하고 허리도 쑤신다. 지난 한 해 동안에도 병원에 가져다준 돈이 수십만 원이 넘는다. 나는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소독약 냄새에 진저리친다. 소독약은 우월성의 냄새를 풍긴다. 소독약은 내 몸 속의 병균을 적대시하고 경멸하는 듯한 냄새를 풍긴다. 병원은 늘 살균되어 있다. 젊은 의사는 나에게 ‘어디가 아프냐’ ‘얼마나 아프냐’라고 묻는다. 병은 나 자신의 생명 속에서 발생한 실존적이고도 사적인 현상이다. 내 병은 나의 생명현상인 것이다. 나는 나의 병을 나 자신의 몸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 나는 나의 병을 객관화하지 못하고 대상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젊은 의사는 기어코 나의 병을 객관화하고 대상화하려고 덤빈다. 아마도 나의 병을 대상화시키지 않으면 의사는 나의 몸에 손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옷을 치켜올리고 의사에게 내 맨 몸을 내맡길 때, 나는 내 병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 나의 이 속수무책을 슬펴한다. (김훈, 질병의 개별성과 의사 – 환자 관계의 직접성. in 마종기 외. 의학과 문학 2004)”

서로 다른 두 우주의 만남에서 한 편은 다른 편의 이해를 인정할 생각이 없다. 아마 두 우주가 동일한 관점을 제공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의사가 제시하는 질병과 치료의 설명이, 환자의 우주에 대한 설명에 맞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우주의 주인이 (또는 해석자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받아들일만한 것을 제공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informed consent가 가능해 질 것이다. 시작일 뿐이라도

[이것을 조금 더 발전시켜 볼 요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