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는 좋은 죽음인가? — 죽음에 대한 네 가지 태도

2026년 10월 15일

‘좋은’이라는 말이 걸린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하는 창구에서 드물지 않게 듣는 말이 있다. “안락사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이거 쓰면 되는 건가요?” 국민의 80% 가까이가 안락사에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는 조사 결과와 겹쳐 놓으면, 이 말은 한 사람의 착각이 아니라 하나의 정서다. 그런데 이 말에는 세 가지가 섞여 있다. ‘안락사’라는 단어, ‘나을 것 같다’는 판단, 그리고 ‘이거’라고 가리킨 서류에 대한 오해. 셋을 하나씩 풀어 보려는 것이 이 글의 일이다.

제목부터 걸리는 데가 있다. 좋다는 것은 선택할 만하다, 바람직하다, 만족스럽다는 뜻인데 이 수식어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죽음은 억울하다는 것이 한국인의 기본 정서이기에 더 그렇다. 그러니 지금 오가는 좋은 죽음 논의는 실상 덜 억울한 죽음, 덜 나쁜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아이고 죽는 게 낫겠다”는 말을 “이젠 좀 살겠네”로 바꾸는 일, 그 역설적인 작업이 우리가 ‘좋은 죽음’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에 가깝다.

그런데 이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뜻밖의 곳에 도착한다. 안락사가 좋은 죽음인지 묻다 보면 우리는 안락사에 대해서보다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 글의 끝에서 그 태도를 네 단어로 정리해 보려 한다.

안락사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들

일상어 ‘안락사’는 너무 많은 것을 품고 있다. 질병의 경과에 따라 맞는 자연사와 병사, 임종과정에 들어선 환자에게 무의미해진 침습적 치료를 하지 않는 연명의료의 중단과 유보, 말기 환자가 의사가 처방한 약을 스스로 복용해 죽는 조력사망, 의료인이 약물을 투여해 생명을 끝내는 적극적 안락사. 사람들은 이 모두를 ‘안락사’라고 부른다. 연명의료 중단도, 통증을 줄이기 위한 모르핀 주사도 안락사라고 불리는 마당이면 이 단어는 행위를 지시하는 개념어로서는 거의 쓸모가 없다.

사전의 정의도 사정을 낫게 하지 못한다. 옥스퍼드 사전은 치료할 수 없거나 고통스러운 질병의 환자, 혹은 돌이킬 수 없는 혼수 상태의 환자를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이라 하고, 피터 싱어는 삶의 질이 극도로 낮아져 삶의 연장이 고통만을 뜻할 때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해 생명을 끝내는 것이라 한다. 둘 다 조건이 모호하고 행위의 주체와 방식이 비어 있다. 쓸모 있는 구별은 행위를 네 요소로 분해할 때 나온다. 어떤 조건에서, 누가, 무엇을 하여, 어떤 결과에 이르는가. 연명의료중단은 임종과정 환자를 의료인이 확인하고 치료를 중단해 임종에 이르는 것이고, 의사조력사망은 말기 환자를 의료인이 확인하고 약을 처방해 환자가 복용하여 사망하는 것이다. 결과 칸의 단어가 다르다. 앞의 것은 질병이 원인인 ‘임종’이고, 뒤의 것은 약물이 원인인 ‘사망’이다. 이 한 칸의 차이가 법이 선을 긋는 자리다.

우리 제도는 이 선을 세 칸으로 나눈다. 임종과정 환자의 연명의료를 중단하거나 유보하는 것은 허용된다. 연명의료결정법이 2018년 2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내용이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바로 이 칸의 문서다. 건강이 나빠진 상태, 수개월 안에 임종하는 것이 놀랍지 않은 말기에서 자신의 가치 판단에 따라 치료를 거부하는 권한은 제한된다. 그리고 건강 상태를 포함한 종합적 판단으로 생명을 끝내는 일은 금지된다. 행복추구권에서 자기결정권이 나오고 거기서 치료를 선택하고 거부할 권리가 나오지만, 그 선택이 죽음으로 직결되는 순간 제약이 생기고, 죽음을 직접 목표로 삼는 순간 법은 그것을 자살이라 부른다.

그러니 창구에서 “이거 쓰면 되는 건가요”라고 묻는 분에게 답은 분명하다. 의향서는 죽음을 앞당기는 요청이 아니다. 말기 이전 단계의 치료 거부도, 통증 조절이나 영양 공급의 중단도, 가족의 부담을 이유로 한 생명의 종결도 아니다. 임종과정에 들어섰을 때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같은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혀 두는 것이며, 호스피스를 이용하겠다는 의사를 함께 적을 수 있고, 언제든 바꾸거나 거둘 수 있다. 그런데 이 답을 하고 나면 질문이 하나 남는다. 그렇다면 이 분이 정말로 원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죽음은 왜 나쁜가

죽음을 미룰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가장 심각한 것은, 사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문제이긴 한데, 의미 없는 식물적 생명만 유지되는 경우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뇌사나 식물상태처럼 의학적으로 깔끔하게 정의되는 상태보다 수치와 영상으로 정립되지 않는 상태가 우리를 더 곤란하게 한다. 1년째 와병 중이지만 병은 없는 90대 노인. 당뇨 합병증으로 5년째 투석을 받는 콩팥병 환자. 뇌졸중 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채 급식관에 기대어 여섯 달을 견디는 80대. 의식은 낮아졌으나 뇌가 기능을 잃은 것은 아니다.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이어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남은 시간 동안 고통을 겪는다면, 그리고 그 고통을 덜 방법이 없다면, 생명의 유지는 고통의 지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고통은 통증만이 아니다. 섬망과 불안, 호흡 곤란, 구강건조와 변비, 배뇨 문제가 통증만큼 어렵다. 그리고 고통에는 의학적인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고립, 가족 안의 갈등, 역할을 잃은 데서 오는 상실감, 주변 사람에 대한 미안함, 실존적 두려움. 이 비의학적 고통에는 의학적 해결을 요구할 수 없고, 그래서 조력사망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점은 뒤에서 다시 다룬다.

여기서 철학적으로 짚어 둘 것이 있다. 회피도 선호의 한 방식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좋은 것을 향하지만, 싫은 것을 멀리하고 없애려는 본능은 그보다 강하다. 어떤 선택에 이유를 요구할 수 있지만 그 이유가 꼭 더 나은 것에 관한 것일 필요는 없다. 끔찍하게 싫은 것을 피하기 위해 매우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일도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다. 안락사, 곧 죽음보다 나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사는 것을 포기하는 행위는 이 점에서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문제는 의학적이지 않은 문제가 죽을 만큼 나쁜 경우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죽음의 나쁨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죽음은 모두가 피하려는 나쁜 것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공허로 보고 거기에 좋고 나쁨을 붙이는 것을 헛수고라 여긴다. 그럴싸한 말이다. 좋고 나쁨은 판단할 사람을 전제하는데, 가장 중요한 판단자가 아무 표현도 할 수 없다면 그 평가는 살아 있는 사람의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살아남은 우리가 죽음을 나쁘게 여기는 이유를 들춰 보면 시신이 주는 감각, 정리의 어려움, 다시 교감할 수 없다는 상실감이 나온다. 이것도 의미는 있다. 그러나 안락사를 생각하는 중에는 죽음을 죽는 사람의 관점에서, 죽음이 죽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의 측면에서 평가해야 한다.

죽음이 나쁜 이유로 네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살아 있는 사람은 죽는 것을 싫어한다. 둘째, 죽는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이 있다. 셋째, 죽음은 삶의 좋은 것을 경험할 기회를 빼앗는다. 넷째, 죽는 사람과 주변의 관계 안에서 죽음은 나쁘게 평가된다. 나는 이 가운데 셋째만이 조건과 무관하게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첫째부터 보자. 죽음을 피하려는 것은 동식물을 통틀어 존재하는 경향이고, 그래서 우리는 존재를 건강하게 유지해 삶의 목적에 부합하게 하는 것을 의무로 여겨 왔다. 그런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죽음을 피한다는 것은 삶의 목적을 실현할 조건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존재의 지속이 삶의 목적과 아무 연관이 없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쪽이 더 큰 자연의 관점에서 더 ‘자연’스럽다. 죽음을 갈망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이 조건부를 증명한다. 둘째, 죽는 과정의 고통은 피해야 할 것이지만 죽음 자체의 평가 기준은 아니다. 우리는 ‘죽음’을 보지 못하고 ‘죽어 있음’을 보며, 그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고통받는 사람뿐이다. 고통 없는 죽음의 과정이 있고,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 분투하는 사람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넷째, 남겨진 사람의 슬픔과 두려움은 죽음이 나쁘다는 판단의 흔한 원천이지만 죽는 사람이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불편한 역설이 숨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단지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투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결론은 우리가 바라지 않는 종류다.

남는 것은 셋째다. 살아 있는 모두에게 원칙적으로 열려 있는 것은 기회뿐이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위로받고 분노하거나 수용하고 성숙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기회. 기회의 균등, 추구할 자유, 도구의 평등 같은 인권의 말들이 모두 여기서 나온다. 죽음은 경험 자체를 앗아가지도, 이전의 경험을 지우지도 않는다. 다만 앞으로 맞이할 기회를 앗아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죽는 과정은 그 기회를 종종 고통으로 채울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기회의 박탈을 애석해한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서 하나를 더 구별해 둘 필요가 있다. 죽음과 죽는 과정과 죽음 이후는 다르다. 죽음 자체는 현상이고 죽음 이후는 상태다. 둘 다 고정되었거나 자연적인 것으로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죽는 과정만이 인간의 사건이고 인간의 일이다. 우리가 손댈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가족과 사회의 관점에서 내리는 죽음의 평가는 납득할 수 있지만 충분한 이유는 아니다. 개인의 가치평가는 중요하지만, 존재의 지속이 존재의 목적에 비추어 의무의 성격을 갖기에 유일한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죽는 과정의 고통은 죽음의 평가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나쁘고 최대한 예방해야 할 것이다. 죽음의 나쁨은 경험 기회의 박탈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기까지 머무르는 공간, 인간적 관계, 치료의 선택지 모두가 이 경험에 비추어 결정되어야 하고, 이 기회가 아직 있는 한 우리는 생존의 의무를 받아들이게 된다.

조력사망 논의가 보여주는 것

조력사망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겪는 신체적·정신적·사회적 고통이 있고, 그 시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의료를 계속하는 것의 정당성이 의심스럽다. 의학적 조치가 다양해져 한 가지 기준을 모두에게 적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개인의 가치를 반영한 치료 결정은 죽음의 방식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요구가 있고, 의학은 식물적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환자의 숙고된 가치판단을 실천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책임의 요구가 있다. 찬성 쪽은 죽음의 방법과 시기를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반대 쪽은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고 말한다. 생명의 불가침성, 부적절한 시행의 위험, 의료전문직의 자기 인식이 반대의 근거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음을 요청하는 동기를 들여다보면 논쟁의 틀 바깥에 있는 것들이 보인다. 신체적·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고, 사회적 평판을 지키려는 자기 배려가 있다. 살아 있는 것의 가치를 잃었다는 사회적 압력이 있고, 가족의 부담을 덜어 주려는 타인 배려가 있다. 창구에서 안락사를 말하는 노인의 상당수는 마지막 동기를 말한다. 그런데 가족의 부담은 조력사망 제도가 전제하는 조건, 곧 말기와 회복 불가능과 의학적 고통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여기가 앞에서 미뤄 둔 지점이다. 조력사망 제도는 의학적 조건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고, 사회적·인격적 고통은 그 설계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된다. 의료화된 죽음을 걱정하는 단계에서 비의학적 고통은 처음부터 다뤄질 수 없다. 안락사에 대한 우려의 실체가 여기 있다. 그것은 의학적이지 않은 문제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 곧 의료화된 자살에 대한 우려다. 프라도(C.G. Prado)가 선제적 생명종결을 논하며 지적한 이론과 실제의 간격도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이론에서는 합리적인 죽음 선택이 가능하고 법과 제도가 그것을 인정하며 합리성을 보장하는 틀이 작동한다. 실제에서는 대부분의 결정이 낯선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환자와 가족은 양쪽 방향으로 압력을 받으며, 의료진은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환자와 상담해야 하고, 충분히 투쟁했는지는 아무도 판단하기 어렵다. 처한 환경과 조건 안에서 죽음의 요청은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환경과 조건 자체를 검토하지 않으면 그 합리성은 반쪽이다.

제도를 가진 나라들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드러난다. 네덜란드는 안락사와 조력사망을 허용하지만 그 전제로 능동적인 완화의료와 보건의료체계의 통합을 두었다. 독일은 2015년 호스피스·완화의료법으로 완화의료 서비스와 사전돌봄계획 교육에 집중했다. 미국은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판결에서 입법으로 나아갔으되 안락사가 아닌 의학적 조력사망을 중심에 두었고, 영국은 보건의료와 가정간호를 통합하고 사전돌봄계획과 호스피스를 강조했다. 조력사망을 허용하든 하지 않든, 법과 제도가 한 일은 돌봄을 위한 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삶의 마지막 시기에 선택은 제한되고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자유롭고 편안하고 깨끗한 죽음은 현실적인 기대가 아니다. 어떤 죽음도 동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한 죽음의 방식이 그것을 좋거나 나쁘게 만들지 않는다. 죽음은 미지의 것이고 그 과정은 종종 길고 고통스럽다. 할 수 있는 것은 그 과정을 지나는 사람을 돌보는 일이다.

죽음에 대한 네 가지 태도

여기까지 오면 처음 질문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안락사가 좋은 죽음인지 묻다가 우리가 실제로 발견한 것은 안락사에 대한 답이 아니라, 인간이 죽음 앞에서 취해 온 태도들이다. 그 태도는 네 단어로 개관할 수 있다. 회피하기, 길들이기, 통제하기, 수용하기.

회피하기는 죽음을 유예시키는 태도다. 모든 생명이 공유하는 가장 오래된 태도이고, 의학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영역이다. 죽음을 미룰 수 있게 된 것은 이 태도의 승리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이 승리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의미 없는 식물적 생명, 수치로 정립되지 않는 긴 와병, 존재의 지속이 삶의 목적과 끊어진 시간. 회피의 태도만으로는 이 시간을 다룰 수 없다. 연명의료결정제도는 회피의 끝자락에서 등장한다. 더 이상 미루는 것이 의미 없을 때 미루기를 멈추겠다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길들이기는 죽음의 괴로움을 줄이는 태도다. 죽음 자체는 손댈 수 없지만 죽는 과정은 인간의 일이므로, 그 과정을 덜 고통스럽게 만들려는 시도가 여기 속한다. 통증 조절, 섬망과 호흡 곤란의 관리, 호스피스와 완화의료가 이 태도의 실천이다. “이젠 좀 살겠네”라는 말이 나오는 자리가 여기다. 제도를 가진 나라들이 조력사망 허용 여부와 무관하게 공통으로 투자한 것도 이 태도였다. 길들이기는 회피하기보다 겸손하다. 죽음을 이기려 하지 않고 죽음의 과정과 함께 지내려 하기 때문이다.

통제하기는 시기와 방식을 결정하려는 태도다. 조력사망과 안락사 논의는 바로 이 태도에서 나온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내가 정하겠다는 것이고, 자기결정권의 언어가 이 태도를 뒷받침한다. 이 태도는 정당한 근거를 가진다. 회피도 선호의 한 방식이며 죽음보다 나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통제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의학적 조건이 갖춰진 죽음뿐이고, 사람들이 실제로 죽음을 요청하는 동기의 많은 부분은 그 조건 바깥에 있다. 시기와 방식을 통제하더라도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으며, 자유롭고 편안하고 깨끗한 죽음은 통제의 결과로 주어지지 않는다. 조력사망 논의가 ‘열린 질문’으로 남는 이유는 이 태도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이 태도가 답할 수 있는 범위가 생각보다 좁기 때문이다.

수용하기는 더 나은 가치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태도다. 죽음의 나쁨이 경험 기회의 박탈이라면, 남은 기회를 어떻게 쓸 것인가가 마지막 물음이 된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위로받고 분노하거나 수용하고 성숙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기회. 수용하기는 죽음을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시기로 보는 것이다. 머무르는 공간과 인간적 관계와 치료의 선택지가 모두 이 경험에 비추어 결정될 때, 죽음의 방식은 ‘나다움’에 관련된 선택이 된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이 억울하지 않게 쓰일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여기뿐일 것이다.

네 태도는 단계라기보다 겹이다. 우리는 하나를 버리고 다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네 가지를 동시에 지닌 채 죽음 앞에 선다. 다만 어느 태도가 앞에 나와 있는지는 사람마다, 시기마다 다르다. 창구에서 “안락사 하는 게 낫겠다”고 말하는 분은 통제하기의 언어를 쓰고 있지만, 그 말의 동기를 들어 보면 길들이기가 필요한 고통이거나 수용하기가 가로막힌 관계인 경우가 많다. 의향서는 통제하기의 문서처럼 보이지만 실은 회피를 멈추고 길들이기와 수용하기로 넘어가는 문턱이다. 상담의 일은 그 사람이 지금 어느 태도에 서 있는지 듣는 데서 시작한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안락사는 좋은 죽음인가. 이제 답할 수 있다. 어떤 죽음의 방식도 그 자체로 죽음을 좋게 만들지 않는다. 안락사와 조력사망은 적절한 생애말기돌봄의 맥락 안에서 살펴보아야 하고, 그 제도적 허용 여부는 열린 질문으로 남겨 두어도 된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마땅한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

글의 첫머리에서 좋은 죽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난 뒤에야 따를 법한 이야기일지 모른다고 했다. 밀턴은 실명한 뒤에 쓴 소네트에서 빛을 거두어 가고도 낮 동안의 노동을 요구하시느냐고 묻다가, 인내의 목소리를 빌려 스스로 답한다. 수많은 천사들이 명령에 따라 육지와 대양을 쉬지 않고 달리지만, 다만 서서 기다리는 자들도 그분을 섬기는 것이라고. 회피하고 길들이고 통제하는 일이 달리는 일이라면, 수용하기는 서서 기다리는 일에 가깝다. 그것도 하나의 일이다. 어쩌면 마지막에 남는 유일한 일이다.

They also serve who only stand and wa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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