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죽음에 관해서

이곳에 와서 할 수 있는 것이 쓰는 일이니까, 미뤄두었던 책임을 해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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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죽음에 관하여
죽음 이야기가 더 이상 민망하지 않게 되었다. 간간히 티브이에서나 보던 존경스러운 죽음과 대조되는 남들이 들을까 목소리를 낮추어 전해야 하던 죽어가던 친지의 모습은,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인데도, 경박하게 들렸다. 나는 어떻게 죽고 싶다는 말은 큰 용기를 내어야 겨우 꺼낼 수 있던, 그리고 결국엔 큰 소리가 날 것을 각오해야 하는 사정이었다. 지난 십여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죽음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하긴 우리 사회만큼 급히 바뀌는 곳도 없구나.
하지만 여전히 죽음은 작정해야 꺼낼 수 있는 이야기거리임이 분명하다. 원래 그렇다. 게다가 우리는 효 개념을 오해하고, 철학자들은 죽음을 어떻게 이름붙여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 아직도 병원은, 기껏 몇 십년 밖에 안된, 관성에 따라, 모순적인 의료행위를 계속한다.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 하게 되었으나 대체 좋은 죽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에 대해서 혼자 고민하고 실수만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밖에 없는 죽음인데도.
제도는 어떤가? 90년대 중반에 우리에게 소개된 외국 제도는 한편 혼란만 더해준 것이 아닌가 염려 하게 된다. 외국과 우리의 문화 차이, 의료 관행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형식을 들여오면서 생긴 일이다. 우리 사회의 경직성을 이야기 해야 한다. 원래 어렵게 변하는 것도 있게 마련이나 오래된 것이라고 꼭 좋은 것이 아니다. 대체 우리 관행, 법률 해석의 문제, 전통과 윤리의 무기력 등이 그것이다. 담론을 통해 제도와 인식을 바꾸기 보다 기존의 이해에 고착하는 것은 되려 전통과 윤리를 무력하게 만들 뿐이다. 바뀌는 죽음과 의료의 풍경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문제는 사회구조에 내재되어 있다. 너무 거창한 이야기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바뀌지 않으면 나도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 번 생각해 보자. 미국의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은 사회구조가 개인이 택한 선택의 결과라고 지적한다(아이리스 영/허라금 등.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p120).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우리는 옷 한 벌 사는데도 타인의 평가를 걱정하고 있지 않나. 그렇게 만든 내 선택은 다시 다른 사람의 선택을 제한하고…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면 내가 내리게 될 선택은 더 강한 족쇄가 되니까. 시각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 내 선택이 다른 사람의 선택을 결정하게 된다면, 나는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획기적인 변화는 아닐 수 있어도 작은 뒤틀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이것이 축적되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을테니까.
제대로 바꾸려면, 정확히 알고 바르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그 일을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