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더 나쁜 죽음의 과정

죽음보다 더 나쁜 죽어가는 과정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죽음 이후의 삶은 이야기 하거나 어떻게 좋고/나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죽음을 나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경험이기 때문에, 문제는 과정에 있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죽음의 두려움, 질병의 고통, 그리고 쇠약함과 상실이 어떤 의미에서 좋다고 할 수 있을까? 혹시 죽음의 고통이 우리를 깨우치는 죽비(竹扉)와 같아서 삶의 본질과 생물학적 삶을 넘어서는 인간의 숭고함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해도, 이런 지식은 몰라도 되는 것 아닌가? 해결책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기에 지친 나머지 사소한 깨달음을, 그 사소함에는 눈을 감은 채, 인생의 비밀이라도 되는 듯 자기 위안으로 삼은 것 아닐까? 죽음은 인간의 삶을 인간의 것으로 만드는 종류의 경험을 영구히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나쁘다. 그리고 피할 방법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죽음의 과정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의학자들에게 죽음의 과정은 어떤 학술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철학자, 신학자들은 안락사니 뇌사니 하는 이야기만 한다. 이해는 된다. 의학적으로 죽음의 과정은 의학의 한계와 의사들의 실패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게다가 죽음의 과정에서 무엇이 더 나은 의학적 조치인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설문도 할 수 없고 혈액검사도 의미없으니. 실천(practice)에 경험없는,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탁상 철학자들에게 죽음의 과정은 너무 낯선 과정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과정이야 말로 우리가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는 과정이기에, 그리고 죽음에 관해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기간이기에 이 시기를 우리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의학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의학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죽어가는 사람의 필요에 맞춘 의료나 돌봄이 중요하다는 것은 호스피스-완화의료를 받은 암환자들이 죽을 때까지 항암치료를 받았던 환자들보다 (비록 몇일에 불과하지만) 더 오래 살았다는 보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몇 일을 더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수명에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통증완화를 포함한 전인적 돌봄을 받은 사람들이 끝까지 병과 ‘전쟁을 벌였던’ 사람들만큼 살았다는 점이다. 인간의 몸은 어찌 보면 떠날 때를 알고 준비하는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경망스럽게 이런저런 짓거리를 하는지 모르지만…
따라서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정말로 불편하게 느끼는 경험과,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더 편안하고, 명료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의사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의사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의학교육 과정에서 죽음에 관한 교육은 포함되지 않는다. 죽음에 관한 (의학적) 내용은 공식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사 개인이 경험을 바탕으로 배운다.(fn) 의사들이 죽음의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것은, 의사들이 발생과 동시에 사회적, 문화적 현상까지 포함하는 사건이 되는 죽음에는 무력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죽음의 과정에 수반되는 불편함과 그해결방법알지 못하는 의사는 정작 필요한 순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달리 표현하면, 죽음을 앞둔 환자는 의학이 부재한 지점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의 과정은 질병의 진행과 분리하기 어렵다. 물론 이것이 의학적 이해의 한계이기도 하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기는 여러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신체 변화와 그 기전을 이해하면 조금이라도 신체적으로 편안하게 할 수 있다. 죽어가는 몸은 건강할 때, 혹은 병든 신체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다르다. 죽음이 닥쳐올 때 우리 몸은 꼭 필요한 기능은 유지하지만 길게 볼 때 중요하지 않은 기능은 더이상 유지하지 않는다. 그 중에 소화기능이 있다. 건강한 사람은 끼니를 거르면 불편함을 느끼고 여러 끼니를 (무슨 이유에서든) 건너게 되면 고통을 경험하지만,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음식을 소화시키는 일이 부담스러워진다. 그래서 쇠약한 환자에게 음식을 주입하게 되면 설사나 소화불량, 심지어 구토까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몸은 더 이상 허기를 느끼지 않고 끼니를 거르는 일이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게 된다. 몸이 천천히 가벼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식이가 필요하고, 소화할 수 있다면, 우리 몸은 음식을 원할 것이다. 우리 몸이 보내는 이런 신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어떤 변화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쇠약하거나 의식이 희미해져 움직임이 줄어든 사람은 근육양이 줄고 인대가 탄력을 잃게 되어 (소위 구축이라고 하는 현상) 통증을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움직임이 줄어들면 혈액뿐 아니라 림프액 등도 적절하게 순환되지 않아 불편하게 만든다. 임종이 다가온 사람이라도 마사지와 관절운동을 통해 구축을 예방하고 체액을 순환시키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종(種)이다.

환자를 돌보는 일은 그의 마지막 경험을 경험할만하게 바꾸는 것에 목표를 둔 활동이 되어야 한다. 불필요한 불편함과 통증, 심리적 고통이 없도록 하는 돌봄뿐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의 삶을 정돈할 수 있도록 – 그렇게 가치를 만들도록 격려하고 함께 하는 일이 돌봄이다. 그런데 병으로 자녀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 많은 노년은 의학적 돌봄뿐 아니라 인격적 돌봄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남아 있는 사람이 “불효자는 웁니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만큼 희생한 후에야 중단되는 오늘날의 치료 현장은 사실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무지, 혹은 사랑이 없어 부모의 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부당하게 요구하는 자식들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면 분개하지만 정작 오늘날 더 편만한 악행, 불필요한 치료로 고통을 안기는 자식들에게는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자녀들은, 부모의 뜻을 알아볼 여지가 없이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치료를 계속한다. 이런 행동은 그들이 충분하게 효도했다고 생각할 때까지, 주변의 누군가 그만하면 효도한 것이라고 말해줄 때까지 계속된다.

불효자가 될 때까지 치료해야 하는 의료는 분명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생각해 보자. 의료는 환자의 고통을 지식과 기술로 줄이는 행위다. 의료가 그 방법을 찾지 않으니, 그리고 적절하게 제공하지 않으니 환자도, 그 자녀들도, 결국엔 의료인들도 고통을 겪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의 경험

# 좋은 죽음이란 어려운 일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인생의 결승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의 길이가 길고 짧은 차이가 있고 약간 평탄하거나 가파른 경기장을 달렸는가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모든 사람의 인생은 분명히 끝이 있는 달리기 경주다. 장거리 경주 순위는 마지막 스퍼트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선수는 기진한 상황에서도 힘을 다해 지금껏 애쓴 성과물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죽어가는 사람의 경험을 이 마지막 질주에 비유하면 심한 비유가 될까? 잘 살기도, 유행하는 말대로 웰빙하기도, 힘들지만 마지막 순간에 균형을 잃고 삶이 형편없어지기는 너무 쉽다. 이전까지 보잘 것 없는 삶이었다 해도 죽음의 순간에 빛이 날 수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마지막 질주는 정말 힘들다.
좋은 죽음을 생각한다면,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어떤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다 한 순간에 꺼지는 것을 이상적인 죽음으로 여기고, 그렇게 죽음을 최대한 뒤로 미루었다가 조금만 경험하기를 바라는 우리 사회의 모순적인 태도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떨쳐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증명할 뿐이며, 우리 사회에서는 죽음의 과정이 더욱 길어지고 있을 뿐이다. 물론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의 사회학자 아서 프랭크는 건강하지만 죽음이나 중병의 공포를 떨쳐내지 못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삶을 관해사회(remission society)라는 표현에 담아낸다. 오늘날 우리는 건강한 것이 아니라 질병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fn).

# 소외(疎外)
죽어가는 사람은, 우리 의료환경 내에서는 정말 길고 어려운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환자가 아니라 (심지어 의사도 아닌)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구성된 의료체계가 원인이다. 우리의 의료체계는 환자를 사연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질병인 것처럼 생각한다. 의료계에서 흔히 하지 말라는 말 중에 “몇 호 간암 말이지… ”라는 표현이 있다. 질병으로 불리우는 환자는 의료진에게 인격체로 대우받을 가능성이 없다. 이런 악습이야 외형적으로는 거의 없어졌지만, 의료진은 여전히 환자를 볼 때 그 인격이 아니라 질병을 떠올리고 환자의 검사 결과를 먼저 기억한다. 한편 의료기관은, 조직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럴 것이다, 환자의 개인적 필요에 맞추어 기관이 제공하는 의료서비스를 유연하게 변경시킬 수 없는데, 때가 되면 예외없이 식사가, 회진이, 검사가 따른다. 만약 개별 기관이 맞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면 의료전달체계라도 효과적으로 환자의 필요에 대응해야 하겠지만 우리의 의료전달체계는 사실상 붕괴된 상황이어서 환자 보호자가 백방으로 수소문해야 하는 처지다.
환자가 소외되는 것은 의료서비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병에 걸린 환자는, 가족과 의료진에 의해 병이라는 현상으로부터 차단되고 만다. 병은 생물학적 현상이지만, 병에는 가족, 직장, 교우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변화의 끝에는 환자가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의 변화가 기다리고 있다. 죽음을 조금이라도 나은 경험으로 바꾸려면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수용할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의료현실은 환자를 질병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효심 때문일 수도 있고, 치료가 아니라 치료비를 걱정해야 하는 실패한 의료체계 때문일수도 있고, 그저 직면하기 어려운 현실을 피하고 보는 인지상정 때문일수도 있겠다. 선의이든 어리석음이든 우리는 정보와 선택으로부터 환자를 소외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 환자가 소외된 결정
죽음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사람은 흔하지 않다.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 방식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흔히 삶과 죽음 중 택일하라는 식의 이야기가 전개되곤 한다. 다른 방법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은 제시한 치료법을 부정하고 의료진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고 만다. 그러면 누구라도 삶을, 치료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치료 방법, 예상되는 결과, 대안 등을 허심탄회하게 상의하는 설명동의 절차가 형식적인 의료현장에서 진정한 선택은 중환자실에 들어가서야, 또는 모든 치료방법을 소진한 후, 그것도 죽음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나 내려야 할 대상이 된다. 이렇게 내리는 의사결정이란 사실 선택이나 결정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이다.
물론 노인 환자라면 자기 의사를 끝까지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이런 환자를 취약한 환자라고 부른다). 질병과 치료에 관한 지식을 모두 이해하기 어렵고, 이미 많은 경우 가족에게 의존하고 있는 노인들은, 특히 죽음의 위협을 몸소 느끼는 상황에서, 가족에게 이 과정을 맡길 것을 요구받고 있다. 결국 (가족 중심의 문화 영향도 있을 것인데) 환자 본인이 직접 의사결정을 내리기 보다 가족을 통한 간접적인 결정이 흔하다. 그런데, 가족의 결정은 예후와 고통을 일차적인 고려사항으로 삼지, 환자의 평소 가치관이 우선하지 않는다. 이 말은 환자의 뜻을 바탕으로 하기 보다 치료가 도움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직접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는 호스피스를 포함한 많은 말기-임종기 (생의 마지막 시기) 의사결정이 환자 본인의 뜻을 ‘직접’ 반영하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다.

대체 왜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환자를 소외시킨 채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두 가지 가정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환자의 뜻이 보통 가족의 결정과 합치할 것이라는 가정이다. 둘째 가족이 환자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가정이다. 환자의 뜻이 가족의 결정과 합치할 것이라는 가정부터 살펴보자. 우리는 가족과 환자를 동일한 의사결정 단위로 간주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의 대리 결정이 이 법을 통해 모순이 발견되고 해결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물론 환자 본인의 뜻은 어디까지 관철되어야 할 것인지, 환자의 결정을 어떻게 합리적이거나, 최소한 삶의 태도와 일관되게 할 수 있을지의 또다른 문제가 따른다. 그리고 이 법은 환자 본인의 뜻이 특별히 강조되기 어렵다. (무의미함에 대한 전제가 있기 때문에) 두번째 가정, 가족의 결정이 환자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것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가족은 환자의 이익을 목표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목표하는 것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가족이 명확히 알고 있는가, 가족 내부의 고민과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한편 의료진도 정보와 의견을 제시하나,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의료진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는 보호자를 설득해서 자신의 뜻에 따르게 만들려는 것이다. 환자나 가족이 정보를 이해하고 올바른 선택을 내리도록 돕는데 있어 적극적이지 않다.

## 선택 소외
환자는 결정을 내릴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죽음의 과정에 들어선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가족에게 알릴 기회를 찾지 못했을 뿐이지 죽음이 가까왔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불길한 것으로 여기는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는- 사회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자녀들은 ‘경망’스러운 행동으로 간주된다. 또 노인이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만’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어쨌든 환자는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소외되지 않은 결정, 좋은 결정이란 무엇인가? 좋은 결정은 (1)정보, (2)가치관, 그리고 (3)자발성이라는 요소를 가진 것이다. 질병의 종류와 예후에 대한 반드시 알아야 할 정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 더 알고 싶은지 자유롭게 대화 나눌 수 있도록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가 안에서 상담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정보에는 치료 방법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환자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도록 예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의료진의 제안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과정이 따르게 된다. 분명히 좋은 결정은 객관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판단은 개인의 기준에 따라 내려져야 한다. 개인이 최종적인 잣대가 되어야 할 것인데, 삶에서 중요한 것, 유지하고 싶은 가치, 중요한 관계 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개인적 가치관은 질병이 발병하기 이전, 죽음의 가능성으로 고통 당하기 전에 확인하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적으로 죽음이 우리에게 선생이 되고 더 나은 선택으로 이끄는 것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의 확인 과정에서 죽음에 압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변의 시선이나 기대에서 자유롭게, 자신에게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특히 부족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죽음을 앞둔 가장 심각한 시점에 내린 결정이라면 그 결정의 내용이 무엇이든 일단 존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이렇게 존중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내린 결정이 자발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우리 의료체계 내에서는 심각하게 결여되어 죽음의 시점에 내린 결정을 믿기 어렵게 만든다.

# 결과 : 적절한 치료기회의 박탈
환자의 결정권에 관해서 우리는 흥미로운 주장을 듣는다. 바로 환자는 정보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족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가치관이 부족하기 때문에 믿을만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가족은 치료에 있어서만큼은 제삼자에 불과하다. 의료진은 환자에게 무관심하고 의료집착적이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기술적인 차원에서만 의견을 제시하라. 이해당사자를 모두 부정하는 이 주장은 대체 무엇을 주장하려는 것인지!
환자는 당연한 권리를 박탈 당했고, 가족이나 의료진에게는 정당한 결정권이 없는 상황에서 죽어가는 환자가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어느 누구도 권리에 따르는 책임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치료 결정은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안전한 치료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에 추가적인 고통만을 더하는, 죽음보다 더 나쁜 상황을 가져올 뿐이다.

좋은 죽음에 관해서

이곳에 와서 할 수 있는 것이 쓰는 일이니까, 미뤄두었던 책임을 해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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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죽음에 관하여
죽음 이야기가 더 이상 민망하지 않게 되었다. 간간히 티브이에서나 보던 존경스러운 죽음과 대조되는 남들이 들을까 목소리를 낮추어 전해야 하던 죽어가던 친지의 모습은,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인데도, 경박하게 들렸다. 나는 어떻게 죽고 싶다는 말은 큰 용기를 내어야 겨우 꺼낼 수 있던, 그리고 결국엔 큰 소리가 날 것을 각오해야 하는 사정이었다. 지난 십여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죽음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하긴 우리 사회만큼 급히 바뀌는 곳도 없구나.
하지만 여전히 죽음은 작정해야 꺼낼 수 있는 이야기거리임이 분명하다. 원래 그렇다. 게다가 우리는 효 개념을 오해하고, 철학자들은 죽음을 어떻게 이름붙여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 아직도 병원은, 기껏 몇 십년 밖에 안된, 관성에 따라, 모순적인 의료행위를 계속한다.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 하게 되었으나 대체 좋은 죽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에 대해서 혼자 고민하고 실수만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밖에 없는 죽음인데도.
제도는 어떤가? 90년대 중반에 우리에게 소개된 외국 제도는 한편 혼란만 더해준 것이 아닌가 염려 하게 된다. 외국과 우리의 문화 차이, 의료 관행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형식을 들여오면서 생긴 일이다. 우리 사회의 경직성을 이야기 해야 한다. 원래 어렵게 변하는 것도 있게 마련이나 오래된 것이라고 꼭 좋은 것이 아니다. 대체 우리 관행, 법률 해석의 문제, 전통과 윤리의 무기력 등이 그것이다. 담론을 통해 제도와 인식을 바꾸기 보다 기존의 이해에 고착하는 것은 되려 전통과 윤리를 무력하게 만들 뿐이다. 바뀌는 죽음과 의료의 풍경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문제는 사회구조에 내재되어 있다. 너무 거창한 이야기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바뀌지 않으면 나도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 번 생각해 보자. 미국의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은 사회구조가 개인이 택한 선택의 결과라고 지적한다(아이리스 영/허라금 등.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p120).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우리는 옷 한 벌 사는데도 타인의 평가를 걱정하고 있지 않나. 그렇게 만든 내 선택은 다시 다른 사람의 선택을 제한하고…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면 내가 내리게 될 선택은 더 강한 족쇄가 되니까. 시각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 내 선택이 다른 사람의 선택을 결정하게 된다면, 나는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획기적인 변화는 아닐 수 있어도 작은 뒤틀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이것이 축적되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을테니까.
제대로 바꾸려면, 정확히 알고 바르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그 일을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