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죽음이란 어려운 일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인생의 결승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의 길이가 길고 짧은 차이가 있고 약간 평탄하거나 가파른 경기장을 달렸는가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모든 사람의 인생은 분명히 끝이 있는 달리기 경주다. 장거리 경주 순위는 마지막 스퍼트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선수는 기진한 상황에서도 힘을 다해 지금껏 애쓴 성과물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죽어가는 사람의 경험을 이 마지막 질주에 비유하면 심한 비유가 될까? 잘 살기도, 유행하는 말대로 웰빙하기도, 힘들지만 마지막 순간에 균형을 잃고 삶이 형편없어지기는 너무 쉽다. 이전까지 보잘 것 없는 삶이었다 해도 죽음의 순간에 빛이 날 수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마지막 질주는 정말 힘들다.
좋은 죽음을 생각한다면,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어떤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다 한 순간에 꺼지는 것을 이상적인 죽음으로 여기고, 그렇게 죽음을 최대한 뒤로 미루었다가 조금만 경험하기를 바라는 우리 사회의 모순적인 태도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떨쳐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증명할 뿐이며, 우리 사회에서는 죽음의 과정이 더욱 길어지고 있을 뿐이다. 물론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의 사회학자 아서 프랭크는 건강하지만 죽음이나 중병의 공포를 떨쳐내지 못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삶을 관해사회(remission society)라는 표현에 담아낸다. 오늘날 우리는 건강한 것이 아니라 질병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fn).
# 소외(疎外)
죽어가는 사람은, 우리 의료환경 내에서는 정말 길고 어려운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환자가 아니라 (심지어 의사도 아닌)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구성된 의료체계가 원인이다. 우리의 의료체계는 환자를 사연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질병인 것처럼 생각한다. 의료계에서 흔히 하지 말라는 말 중에 “몇 호 간암 말이지… ”라는 표현이 있다. 질병으로 불리우는 환자는 의료진에게 인격체로 대우받을 가능성이 없다. 이런 악습이야 외형적으로는 거의 없어졌지만, 의료진은 여전히 환자를 볼 때 그 인격이 아니라 질병을 떠올리고 환자의 검사 결과를 먼저 기억한다. 한편 의료기관은, 조직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럴 것이다, 환자의 개인적 필요에 맞추어 기관이 제공하는 의료서비스를 유연하게 변경시킬 수 없는데, 때가 되면 예외없이 식사가, 회진이, 검사가 따른다. 만약 개별 기관이 맞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면 의료전달체계라도 효과적으로 환자의 필요에 대응해야 하겠지만 우리의 의료전달체계는 사실상 붕괴된 상황이어서 환자 보호자가 백방으로 수소문해야 하는 처지다.
환자가 소외되는 것은 의료서비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병에 걸린 환자는, 가족과 의료진에 의해 병이라는 현상으로부터 차단되고 만다. 병은 생물학적 현상이지만, 병에는 가족, 직장, 교우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변화의 끝에는 환자가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의 변화가 기다리고 있다. 죽음을 조금이라도 나은 경험으로 바꾸려면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수용할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의료현실은 환자를 질병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효심 때문일 수도 있고, 치료가 아니라 치료비를 걱정해야 하는 실패한 의료체계 때문일수도 있고, 그저 직면하기 어려운 현실을 피하고 보는 인지상정 때문일수도 있겠다. 선의이든 어리석음이든 우리는 정보와 선택으로부터 환자를 소외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 환자가 소외된 결정
죽음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사람은 흔하지 않다.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 방식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흔히 삶과 죽음 중 택일하라는 식의 이야기가 전개되곤 한다. 다른 방법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은 제시한 치료법을 부정하고 의료진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고 만다. 그러면 누구라도 삶을, 치료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치료 방법, 예상되는 결과, 대안 등을 허심탄회하게 상의하는 설명동의 절차가 형식적인 의료현장에서 진정한 선택은 중환자실에 들어가서야, 또는 모든 치료방법을 소진한 후, 그것도 죽음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나 내려야 할 대상이 된다. 이렇게 내리는 의사결정이란 사실 선택이나 결정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이다.
물론 노인 환자라면 자기 의사를 끝까지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이런 환자를 취약한 환자라고 부른다). 질병과 치료에 관한 지식을 모두 이해하기 어렵고, 이미 많은 경우 가족에게 의존하고 있는 노인들은, 특히 죽음의 위협을 몸소 느끼는 상황에서, 가족에게 이 과정을 맡길 것을 요구받고 있다. 결국 (가족 중심의 문화 영향도 있을 것인데) 환자 본인이 직접 의사결정을 내리기 보다 가족을 통한 간접적인 결정이 흔하다. 그런데, 가족의 결정은 예후와 고통을 일차적인 고려사항으로 삼지, 환자의 평소 가치관이 우선하지 않는다. 이 말은 환자의 뜻을 바탕으로 하기 보다 치료가 도움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직접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는 호스피스를 포함한 많은 말기-임종기 (생의 마지막 시기) 의사결정이 환자 본인의 뜻을 ‘직접’ 반영하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다.
대체 왜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환자를 소외시킨 채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두 가지 가정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환자의 뜻이 보통 가족의 결정과 합치할 것이라는 가정이다. 둘째 가족이 환자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가정이다. 환자의 뜻이 가족의 결정과 합치할 것이라는 가정부터 살펴보자. 우리는 가족과 환자를 동일한 의사결정 단위로 간주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의 대리 결정이 이 법을 통해 모순이 발견되고 해결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물론 환자 본인의 뜻은 어디까지 관철되어야 할 것인지, 환자의 결정을 어떻게 합리적이거나, 최소한 삶의 태도와 일관되게 할 수 있을지의 또다른 문제가 따른다. 그리고 이 법은 환자 본인의 뜻이 특별히 강조되기 어렵다. (무의미함에 대한 전제가 있기 때문에) 두번째 가정, 가족의 결정이 환자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것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가족은 환자의 이익을 목표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목표하는 것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가족이 명확히 알고 있는가, 가족 내부의 고민과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한편 의료진도 정보와 의견을 제시하나,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의료진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는 보호자를 설득해서 자신의 뜻에 따르게 만들려는 것이다. 환자나 가족이 정보를 이해하고 올바른 선택을 내리도록 돕는데 있어 적극적이지 않다.
## 선택 소외
환자는 결정을 내릴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죽음의 과정에 들어선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가족에게 알릴 기회를 찾지 못했을 뿐이지 죽음이 가까왔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불길한 것으로 여기는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는- 사회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자녀들은 ‘경망’스러운 행동으로 간주된다. 또 노인이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만’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어쨌든 환자는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소외되지 않은 결정, 좋은 결정이란 무엇인가? 좋은 결정은 (1)정보, (2)가치관, 그리고 (3)자발성이라는 요소를 가진 것이다. 질병의 종류와 예후에 대한 반드시 알아야 할 정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 더 알고 싶은지 자유롭게 대화 나눌 수 있도록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가 안에서 상담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정보에는 치료 방법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환자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도록 예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의료진의 제안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과정이 따르게 된다. 분명히 좋은 결정은 객관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판단은 개인의 기준에 따라 내려져야 한다. 개인이 최종적인 잣대가 되어야 할 것인데, 삶에서 중요한 것, 유지하고 싶은 가치, 중요한 관계 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개인적 가치관은 질병이 발병하기 이전, 죽음의 가능성으로 고통 당하기 전에 확인하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적으로 죽음이 우리에게 선생이 되고 더 나은 선택으로 이끄는 것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의 확인 과정에서 죽음에 압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변의 시선이나 기대에서 자유롭게, 자신에게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특히 부족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죽음을 앞둔 가장 심각한 시점에 내린 결정이라면 그 결정의 내용이 무엇이든 일단 존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이렇게 존중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내린 결정이 자발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우리 의료체계 내에서는 심각하게 결여되어 죽음의 시점에 내린 결정을 믿기 어렵게 만든다.
# 결과 : 적절한 치료기회의 박탈
환자의 결정권에 관해서 우리는 흥미로운 주장을 듣는다. 바로 환자는 정보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족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가치관이 부족하기 때문에 믿을만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가족은 치료에 있어서만큼은 제삼자에 불과하다. 의료진은 환자에게 무관심하고 의료집착적이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기술적인 차원에서만 의견을 제시하라. 이해당사자를 모두 부정하는 이 주장은 대체 무엇을 주장하려는 것인지!
환자는 당연한 권리를 박탈 당했고, 가족이나 의료진에게는 정당한 결정권이 없는 상황에서 죽어가는 환자가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어느 누구도 권리에 따르는 책임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치료 결정은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안전한 치료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에 추가적인 고통만을 더하는, 죽음보다 더 나쁜 상황을 가져올 뿐이다.
글이 좋아요😘재밌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