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드러난 청와대의 의사결정과정에 모든 국민이 분노했다. 진실을 드러내어 알리고, 책임을 묻는 일을 국민이 직접 챙기게 생겼다. 명문대학의 학사관리가 공정하지 않다는 문제제기로 시작되었고, 여기에 관련된 어떤 일가가 알고보니 공공의 자원을 사유화하고 있었고, 그것이 사소한 측근 비리가 아니라 대통령의 의사결정때문에 생긴 일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국정이 무당에게 놀아난 셈이라니!
이 과정 모두가 합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보다 한국 사회의 종교성을 걱정하게 된다.
1. 개인적 일탈을 밝혀내야 할 제도와 제도의 관리자들이 사실은 공범이었다.
제도의 문제인지,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문제인지. 만약 학사 관리제도가 작동하지 않고, 사법제도의 견제 기능이 거세되었으며, 공직자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을 충성의 대상으로 생각했기에 문제가 생겼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범죄를 행위자의 문제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지금까지 반복된 비리와 공권력을 덮어쓴 야만의 확대/변형이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런 수준의 개인이 공직을 차지하게 되어 있는 제도다. 고시-정부주도의 경제/사회구조-경쟁과 적대관계로 구성된 인간관계. 끔찍한 상상이지만 이런 구조가 존속하는 한 이런 ‘개인적’ 일탈은 반복될 것이다. 우리 제도는 총체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2. 협박을 통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제도가 개인의 합리성을 보장할 수 없게 된 사회에는 합리적으로 승인받았다는 의미에서, 정당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당한 권력이 없는 세계는 토머스 홉스의 표현을 빌리면, 야수들이 벌이는 전쟁상황이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들 사이의 먹이사슬이었다. 국민 위에 앉아 있던 그들도 먹이사슬을 구성하는 일부에 불과했다는 사실. 국민을 겁박하는 그들 자신도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 이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달성한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는 수십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제도는 이런 문제 앞에 속수무책이다.
3. 대화와 합의가 아닌 믿음이 정치적 결정의 배후에 있다.
우리는 가장 큰 권력을 행사했던 자가 신앙의 허울을 덮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당 놀음이 이 모든 불합리를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 탐욕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은 자뭇 충격적이지만. 무속신앙이라는 말로 그들의 모든 죄를 설명할 수 있을까?
무속인이 아니라 기성 종교인이 대통령을 보좌했다면 우리는 조금 덜 화가 났을까? ‘건전한’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대로 된 교회를 목회하는 남자 목사였다면? 신앙의 도리를 대통령에게 조언하고 대통령이 그의 조언을 따랐다면? 이런 종류에 우호적일 개신교인들은 무엇이라 말할까? 솔직하게 기독교가 바라는 정치참여가 이런 모습은 아닌가? 그 자리를 유사 기독교가 (기독교와 같은 구조를 가졌다는 점에서) 차지했다는 점을 분하게 느끼고 빼앗으려 할까?
신앙은 합리적으로 구성된(끊임없이 개선된다는 가정하에) 제도를 대신할 수 없는 것 같다. 무슨 이유인지 아직 확실하게는 모르겠으나 종교적 원리는 다원화된 사회를 이끌 능력이 없다. 목적과 수단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종교의 특성과 무관한 것 같지 않다. 그것이 내가 최순실 사건을 보면서 갖게 된 불안함의 한 단면이다. 우리 민족은 지나치게 종교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