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과 휴머니즘: 무엇이 우선인가?

이 사진을 기억하는가?

기자정신으로 안전하지 않은 곳을 돌아다닌 존 카터에게 퓰리처 상을,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비난을 안긴 사진이다.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관련기사). 그에게 쏟아진 비난은 죽음을 앞둔 아이를 버려둔 채 달려가는 저널리즘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안전 문제 때문에 현지인과 접촉하지 말라는 활동가의 지시가 있었다고 자신을 변호했지만 그 변호는 완전하지 않았다.

JTBC 기자가 정유라의 은신처를 신고하고, 다시 그의 검거 현장을 촬영했다. 그리고 심각한 저널리즘의 위기라는 경보가 울린다(관련기사). 이번에 그가 받는 비난은 존 카터의 경우와 정반대이다. 어떻게 기자가 자신이 개입한 사건을 보도할 수 있는가? 이 비난은 기자는 객관적이어야 하고, 그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자연인으로서 갖는 의무를 버릴 수 있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사실 이런 중립성 때문에 기자들은 분쟁지역에서도 기사작성의 자유와 안전을 보호 받는다.
그러니 아마 기자는 곤경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jtbc의 보도를 거북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생겼는지도 모르니. 그는 보도의 원칙을 어긴 사람이다.

모든 ‘전문직’은 섬세한 윤리의식을 발전시키고, 전수한다. 이번 사건은 저널리즘의 문제다. 그런데 이 보도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라는 큰 그림의 일부였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다른 전문직의 일탈을 발견한다. 의사, 고위공무원, 투자가… 그들 나름대로 전문직의 에토스가 있었다. 환자의 비밀을 지킨다, 조직의 안위를 유지한다, 정보원을 보호한다. 어느 하나도 인정되지 않았다. jtbc의 그 기자가 저널리즘의 에토스를 유지했다면, 그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까?
나는 다른 사건도 기억한다. 삼성이 검사들에게 떡값을 제공해 왔던 사실을 고발했던 MBC 기자들, 변호사 김용철… 이들 역시 언론윤리와 법조인 윤리를 근거로 호되게 비난을 받았다. 결국 그들은 전문직 내에서는 배제당하는 길을 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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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에는 인도주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주권국 사이의 불간섭은 인도주의의 문제에까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해다. UN 평화유지군이 인도주의원칙에 의존해서 파병된다. 인권의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전쟁을 불사하는 태도 문제다. 이렇게 한 영역 안에서 유지되는 원칙이라도, 심지어 현실적인 이유로 유지되는 경우라도, 그 원칙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존 카터는 생명의 문제 앞에서 저널리즘을 포기했어야 했다. 대기업의 조직적 부정 앞에 법조인은 고객의 비밀을 지킬 의무에서 면제받는다. 최순실과 박근혜의 문제 앞에서 기자는 대체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나? 그의 행위는 더 앞선 가치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그의 처지를 동정한다. 저널리즘 원칙을 지켰어도, 정의감에 따른 행동을 했어도, 그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쪽을 잡았어도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딜레마다. 돌진하는 황소의 뿔은 어느 한쪽을 잡아도 찔릴 수밖에 없다. 기자가 처한 곤경과 그의 시대에 유감을 먼저 표하라. 그리고 그의 시대는 윤리의 한계이기도 했음을 인정하자.

무당, 목사, 합리성에 관해서

 

최근 드러난 청와대의 의사결정과정에 모든 국민이 분노했다. 진실을 드러내어 알리고, 책임을 묻는 일을 국민이 직접 챙기게 생겼다. 명문대학의 학사관리가 공정하지 않다는 문제제기로 시작되었고, 여기에 관련된 어떤 일가가 알고보니 공공의 자원을 사유화하고 있었고, 그것이 사소한 측근 비리가 아니라 대통령의 의사결정때문에 생긴 일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국정이 무당에게 놀아난 셈이라니!

이 과정 모두가 합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보다 한국 사회의 종교성을 걱정하게 된다.

1. 개인적 일탈을 밝혀내야 할 제도와 제도의 관리자들이 사실은 공범이었다.
제도의 문제인지,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문제인지. 만약 학사 관리제도가 작동하지 않고, 사법제도의 견제 기능이 거세되었으며, 공직자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을 충성의 대상으로 생각했기에 문제가 생겼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범죄를 행위자의 문제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지금까지 반복된 비리와 공권력을 덮어쓴 야만의 확대/변형이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런 수준의 개인이 공직을 차지하게 되어 있는 제도다. 고시-정부주도의 경제/사회구조-경쟁과 적대관계로 구성된 인간관계. 끔찍한 상상이지만 이런 구조가 존속하는 한 이런 ‘개인적’ 일탈은 반복될 것이다. 우리 제도는 총체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2. 협박을 통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제도가 개인의 합리성을 보장할 수 없게 된 사회에는 합리적으로 승인받았다는 의미에서, 정당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당한 권력이 없는 세계는 토머스 홉스의 표현을 빌리면, 야수들이 벌이는 전쟁상황이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들 사이의 먹이사슬이었다. 국민 위에 앉아 있던 그들도 먹이사슬을 구성하는 일부에 불과했다는 사실. 국민을 겁박하는 그들 자신도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 이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달성한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는 수십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제도는 이런 문제 앞에 속수무책이다.

3. 대화와 합의가 아닌 믿음이 정치적 결정의 배후에 있다.
우리는 가장 큰 권력을 행사했던 자가 신앙의 허울을 덮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당 놀음이 이 모든 불합리를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 탐욕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은 자뭇 충격적이지만. 무속신앙이라는 말로 그들의 모든 죄를 설명할 수 있을까?

무속인이 아니라 기성 종교인이 대통령을 보좌했다면 우리는 조금 덜 화가 났을까? ‘건전한’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대로 된 교회를 목회하는 남자 목사였다면? 신앙의 도리를 대통령에게 조언하고 대통령이 그의 조언을 따랐다면? 이런 종류에 우호적일 개신교인들은 무엇이라 말할까? 솔직하게 기독교가 바라는 정치참여가 이런 모습은 아닌가? 그 자리를 유사 기독교가 (기독교와 같은 구조를 가졌다는 점에서) 차지했다는 점을 분하게 느끼고 빼앗으려 할까?

신앙은 합리적으로 구성된(끊임없이 개선된다는 가정하에) 제도를 대신할 수 없는 것 같다. 무슨 이유인지 아직 확실하게는 모르겠으나 종교적 원리는 다원화된 사회를 이끌 능력이 없다. 목적과 수단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종교의 특성과 무관한 것 같지 않다. 그것이 내가 최순실 사건을 보면서 갖게 된 불안함의 한 단면이다. 우리 민족은 지나치게 종교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