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I Could Tell You (Wyston Hugh Auden, 1940)

# If I Could Tell You (Wyston Hugh Auden, 1940)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Time only knows the price we have to pay;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시간이 조금 나면 시나 소설도 좀 읽고 글을 남겨두려 했습니다. 그게 몇 달이 지나서야 되네요. 영국 시인 오든(W H Auden)의 시를 처음 올립니다. 우리 말로 잘 번역된 것을 찾기 어려워 직접 번역하는 만용을 부렸으니 이해해 주세요.

시간은 아무말도 하지 않으리라.

내가 말할 수 있다면 (W H 오든, 1940)
시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시간만이 우리 갚을 대가를 알고 있다.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을 것이다.

어릿광대가 놀음을 시작할 때 울어야 할지,
음악가가 연주할 때 더듬거려야 할지,
시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말했다.

말할 수 있는 운명이 더는 없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말보다 품은 사랑이 더 크기에,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올 때, 시작한 곳 어딘가 있으리라.
잎새가 마를 때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시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장미는 진정으로 자라고자 할 것이다.
환상은 환상으로 머무르기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으리라.

사자(獅子)들이 일어서 어디로 가고
멈추지 않는 흐름과 용사들이 멀리 사라진다 해보자.
그때도 시간은 아무 말 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고 할까?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으리라.

——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으리라.

2차세계대전의 참화 속에 쓰여진 시. 젊은이들의 죽음을 경험한 , 그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살았기 때문에 경험한 아이러니를 담아낸 시. 진실 혹은 진리는 답하지 않는 현실의 무게.

“Time only knows… but will say nothing.” 우리는 진실에게서 어떤 감정도 위로도 기대할 수 없다. 진리는 저기에 그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위로를 구하지만 차가운 대답만이 돌아온다. 게다가 시간이 전하는 깨달음이란, 대책을 세울 수 없는 것. 막상 닥친 후에야, 그렇게 되고 난 후에야 ‘그렇구나’라고 탄식하게 되는 것. “I told you so.” 혹시 우리가 살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대가를 알면 심판의 순간을 피할 수 있을까? (이 말을 하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다. 아마 신(神)일 수도 있다. 그렇게 엄숙하기에 우리는 아무 대답을 찾을 수 없으리라).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은, 답을 하려 애쓰지만 그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할 뿐이다. 그리고 이 무지의 고백이 이 시를 끌어가는 주제다. 물론 사랑으로 (4연) 극복을 시도하지만 시인-인간은 역부족이다 (2-6연의 중심에 4연이 자리잡고 있다. 4연은 인간성의 상징이다).

2연. 죽음은 젊음과 노인의 시절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기에 우리는 어릿광대를 보고 깔깔대는 아이를 보면서, 혹은 노련한 음악가의 연주를 보면서 울지, 혹은 아연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3연. 찰나에 불과한 우리 인생도, 그 인생의 사그러듦도, 세상 모든 것에는 까닭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나, 나 역시 모른다고 고백할 밖에.

5연. 젊음의 아름다움 (roses)도 노년의 변화도(vision) -환상은 노년의 것이다. 젊음은 그 아름다움에 자신을 질식시키기 마련이기에, 변혁은 노인의 것이다 (기독교적 비전)- 그저 머무르다 떠나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고 싶어하는 우리지만, 어떻게 하겠나.

6연. 운명에 저항하는 일을 결국 멈출 것이다. 사자도 용사도 멈추지 않는 흐름마저도, 모든 것이 떠난 후에도 대체 무엇이 남을까? 그렇게 저항하지 않는다면 시간의 엄숙한 선고는 그 힘을 갖게 될까? 그리 되기를 바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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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I Could Tell You (Wyston Hugh Auden, 1940)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Time only knows the price we have to pay;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If we should weep when clowns put on their show,
If we should stumble when musicians play,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If we should weep when clowns put on their show,
If we should stumble when musicians play,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There are no fortunes to be told, although,
Because I love you more than I can say,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The winds must come from somewhere when they blow,
There must be reasons why the leaves decay;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Perhaps the roses really want to grow,
The vision seriously intends to stay;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Suppose the lions all get up and go,
And all the brooks and soldiers run away;
Will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안녕이라고 말할 때까지”

Susan Spencer-Wendell은 민완기자로 삶의 정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이가 갑작스럽게 루게릭병(ALS)을 진단받고 병에 대처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 “안녕이라고 말할 때까지(문학동네, 2014)”다.

이 책을 가지고 했던 학생들의 토론 발표를 들으면서, 솔직히 걱정하면서 들었지만, 많이 배웠다. 배운 것들..

1. 환자는 가족에게 받기만 하는가?
전통적인 환자노릇과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2. SNS와 질병과 문화
SNS에 투병기가 오르는 일은 별로 없다. 이상하게도… 블로그에는 투병기가 올라오지만 타인에게, 그것도 어느정도 구체적인 타인에게는 질병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가?

3.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
아프든 건강하든 사람은 균형을 잡고 살아가야 한다. 균형을 잃기 쉬운 게 아픈 사람이긴 하다. 이야기(narrative)라는 차원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질서(order)가 필요하고, 질서는 사건의 의미(meaning)와 직결된다. 맥락을 확인함으로써 의미를 찾고, 의미를 통해 질서를 회복하는 일종의 순환 과정을 환자는 경험해야 한다.

4. 내 입으로 나의 병을 직접 인정하는 일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내게 맞춰달라는 이기적인 요구일수도 도움의 요청일수도 있다.

5. 혼자 앓지 않는다
가족이나 친구들도 함께 앓는다. 누가 병에 관해 이야기 하는가에 따라 매우 다른 이야기가 될 수는 있다.

6. 살아온 방식대로 아프고, 죽는다
학생들은 지난 주에 보았던 Stopped on Track이라는 영화의 주인공과 수전을 비교했다. 사람은 병에 저항한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써서. 그 자산이 적은 사람이 힘겨운 것은 당연한 일.

7. 우리는 생생한 삶을 원한다
아픈 사람의 경험은 제한된다. 제약을 뛰어 넘으려면 혹시라도 최신의 치료를 거부해야 할 때가 생긴다. 분명한 자기 인식을 유지하면서 삶을 마치는 일은, 추구할 가치가 충분한 일이다. 의사는 이런 과정에 조금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학생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을 발견했다. 기분이 좋다.

분열적인 죽음 판정

지금 제네바에서 WHO Expert Consultation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다. WHO가 캐나다의 지원을 받아 조직한 그룹 내에서 지난 몇 년간 논의되어왔던 “죽음의 판정절차”를 최종적으로 다듬고 결정짓기 위한 자문회의였다.

몇 차례 회의 때마다 반복된 죽음의 정의와 관련된 “윤리적, 법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개최측은 처음부터 이번 회의가 “임상적, 과학적” 측면에 국한된 것이라고 강조해왔는데, 그렇게 논의를 좁힌 결과일지, 이번 회의는 수월하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심장사 진단 과정에서 반드시 충족해야 할 임상적/진단적 기준을 먼저 논의했고, 이어서 논란의 핵심에 있는 뇌사 진단 과정의 문제를 이야기 했다.

심장사는 비교적 간단할 수 있었던 것이 어느 사회라도 심폐기능정지가 죽음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국제 회의까지 거쳐야 했던 것은 ECG, intra-arterial (BP) monitor, ecocardigram을 활용할 수 없는 남반구 의료시설에서도 심폐사 진단이 선진국과 동일한 최종적인 판단이 되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임상적인 진단으로 사망을 확진할 수 있으나, 가능하면 진단기구를 활용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뇌사는 그렇지 않다. 이미 뇌사라는 것 자체가 기술의존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호흡보조장치와 다양한 신체계측, 약물 및 보조적 조치가 없으면 이미 뇌사라는 현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의 경우라도 진단 과정에서 CT나 Transcranial doppler 등의 진단 도구 사용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특히 CT angio 검사 없이도 뇌사판정이 가능하도록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애썼다. 결국 여기서도 임상적 진단과 보조적 진단검사를 구분하고, 필요한 조건 등을 제시하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런 진단 기준은 우리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제시하고 있는 뇌사판정기준과 상충하거나 하지는 않아 필자가 크게 목소리를 높일 필요는 없었다. 우리 법은, 우리나라 의료서비스가 심각하게 기술의존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제시된 기준에 못미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합의가 가능했던 것은 모호한 표현을 최대한 줄이자, 임상적 내용에 집중하자는 초기 제약이 크게 영향을 미쳤고, 참석자들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로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불편했던 것은, 사석에서 주최측이 한 말처럼, 일본(여기에는 한국도 포함된다는 불편한 진실)이 말썽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법은 1990년대 말 뇌사자 장기공여를 합법화 하기 위해 급히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장기이식을 위한 뇌사판정만을 인정하는 괴상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정말 괴상하다. 논리적으로 우리 법 x체계는 뇌사자의 장기를 착취하는 구조다. 죽지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치고 장기를 가족의 허락을 받아 떼내는 이런 괴상한 논리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나는 참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3000명 가까운 뇌사자가 집중치료를 받는다는 연구 조사가 있다(무의미한 치료라는 논쟁적 표현을 피하더라도 이 환자들은 고통받고 있다. 분명히). 뇌사 인정문제는 장기이식과 무관한 문제다. 이걸 구별하려 하지 않는 우리의 게으름을 부끄러워 하자. 어떻게든 사망에 관한 법적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 추가

이번 회의 내내 몇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과학은 윤리를 앞서갈 수 있을까? 보통 윤리가 과학의 한계를 짓는다고들 하지만, 이번 회의는 그 반대의 가능성을 보였다. 동시에 과학적 논의가 윤리적-철학적 논의를 피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회의 주최자들의 나이브함도 솔직히 – 그러나 여기 참석한 임상가 중 이런 회의적인 태도는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