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

죽음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예상 못한 판결이 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인공지능으로 판결을 해도 이렇게는 안나오겠다. 말미에 일가족을 모두 구금하지는 않는다는 결정은 법에도 눈물이 있기 때문인가?

이들 가족의 죄는 무지이고, 아버지에게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할 한국의 의료체계를 사용했다는 점일 것이다. 아버지의 통증을 약국에서 사온 약으로 해결해야 했던 이들의, 비록 무지했지만, 곤고함을 정말 알지 못했던 것일까?

사형수라도 하루 먼저 죽이면 살인이라는 기막힌 판결, 그 논리를 아버지를 제 손으로 죽여야 했던 아들과 딸에게 적용하는 일은 지성이 하는 일이 아니다. 살고 죽는 일은 신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나온 판결일까? 왜 나는 자꾸 그런 의심이 들까? 그건 믿음이 아니라 맹종이라는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

파업은 정당한가?

의사에게 파업할 권리가 없다는 말은 억지다. 어떤 직업도 자신의 이익과 생각하는 대의를 위해서 잠시 직무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지난 주말 의협이 내세운 파업의 이유는 정당해 보인다. 대형병원과 몇개 대기업이 연합한 형태로 등장할 의료민영화의 가능성, 정부의 의료에 대한 무관심 (무관심을 넘어서 악의적이지 않은가 의심할 수준의 정책), 의료전달체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일차진료의 붕괴 가능성, 그리고 의사와 의료직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그러나 의사들의 정당한 주장은, 포탈의 댓글을 보면,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다. ‘잠시 쉬겠다는 말이구나’, ‘이 참에 민영화 하자’ 같은 댓글은 또다른 댓글 조작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의사에 대해 악의적이다. 만약 이 정도로 의사가 미움을 받고 있다면 판을 새로 짜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내 생각에 의사협회는 의료전달체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일차의료는 사회 공공서비스의 일부이고 일차진료의는 그런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적 기능을 갖는다. 그리고 그 서비스의 범위는, 미안하지만, 사회적 합의를 통해 규정된다. 지금처럼 대학병원 하는 진료 다 하면서 일차의료를 제공하면 일차의료를 보호해 줄 이유가 없다.

간단히 말하면 의사들은 공공서비스에 포함되어야 살 수 있다. 안그러면 민영화의 물결을 벗어날 수 없다. 공공서비스가 아닌 것은 모두 민영화 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그렇게 미워하는 사회주의 의료를 품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흥미로운 역설이 하나 있다. 사회주의 의료를 현재 우리 의료가 가진 모순의 뿌리로 여기는 민초의사들은 사회주의 의료의 이념인 일차의료를 제공하는 사람들이다. 일차의료나 의료전달체계를 포기하면 민영화가 답이고, 지난 주말 의사들은 민영화에 반대한다며 깃발을 들었다.

민영화하지 않으면서 의학적 판단과 의료행위의 자유를 보장받을 방법이 있을까? 한가지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국민평균소득이 오만불이 되고, 그중에 20%를 의료에 지출하며, 의사 수가 지금의 두배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니 우리는 제약을 받아들여야 한다. 맘대로 하는 것? 그런 방법은 없다

BK Plus 연구윤리세미나

해마다 열리는 BK 연구윤리세미나 진행 중.

올해는 논문을 어떻게 쓰고, 작성 과정에서 무엇을 주의해야 할지 살펴보는 시간으로 준비했다. 2010년 쯤 연구윤리세미나에 처음 참여할 땐, 행사처럼 진행했던 기억이 남았는데 이제는 제법 형태가 갖춰졌다.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실제로 상의하는 세미나로 진행된다.

그만큼 준비하는 나도 부담이 많아지고, 내가 적절한 사람인지 당연한 질문이 따른다. 연구윤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나는, 정말 적합한 사람인가?

링크

세 사람의 DNA를 가진 배아

세 사람의 DNA를 가진 배아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안에 있지만 독립적인 DNA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DNA에도 고장이 생기고 이로 인해 유전되는 병이 존재한다. 미토콘드리아의 DNA는 오직 어머니로부터 유전되기 때문에 미토콘드리아의 병은 100% 유전된다고 보아야 한다.

체외 수정이 가능하고, 난세포에서 핵을 추출해내는 기술도 활용할 수 있게 되어서 새로운 해결책이 제안되었다. 기증받은 건강한 난세포에서 핵을 제거하고, 어머니가 되려는 (하지만 미토콘드리아에는 병이 있는) 여성의 핵을 이식하고 (그렇게 해서 건강한 난자가 만들어지면), 그 난자에 아버지의 정자를 수정시키면 미토콘드리아 유전 질환이 없는 배아가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까지 수정과정에 개입해야 할 것인가? 아버지/어머니/난자기증자의 DNA를 가진 배아를 만들어야 할까? 핵치환은 안전한가? 그렇게 해서 우리가 바란 건강한 아이가 출생한다는 보장이 있는가? 같은 복잡한 문제가 따르고 논쟁도 있다는 것이다.

영국은, 역시 이런 문제를 먼저 벌이는 국가답게, 작년에 긍정적인 논의가 진행된 바 있다(http://www.bbc.co.uk/news/health-23079276)

우리나라는? 이미 어디선가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연명의료문제를 법으로 해결하기

오늘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에서 연명의료결정관련 입법안을 소개하는 발제를 하게 되었다.

늦은 감이 있는 입법이고, 그 내용도 (환자의 자기결정권 입장에서 보면) 심하게 축소되어 있는 법안이지만 걱정하는 사람들 많다. 그 걱정이란 게, ‘죽을 것임을 어떻게 아느냐’, ‘사람마음이란 변하게 마련인데 이전에 한말 그대로 하면 안된다’, 그리고 ‘사람 죽는게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정도로 모이는 것 같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입법의 중요한 목적을 잊는 것 같다. 그 목적이란 “죽어가는 연약한 인간을 소외로부터 보호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경험할 일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대처하지도 못한채 낯선 사람, 낯선 환경에서, 사랑하지만 남일수밖에 없는 가족과 친지에게 결정을 맡기는 것이  소외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우리 문화가 체면을 앞세워 정작 돌보아야 할 환자는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지 않는지 돌이켜볼 일이다.

물론 의심은 권리고, 그런 의심으로 모든 제도는 모순을 극복하고 받아들일만하게 변화한다. 또 이런 의심을 제기하는 이들의 선의를 나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선의가 있지도 않은, 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점만을 부각시켜, 결국 말못하고 죽어가는 이들이 겪는 어마어마한 악을 유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선의를 선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