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할 수 없는 사람들…

지난 달 JME에 재미있는 논문이 하나 게재되었다. “Nudges in a post-truth world” 논문은 증거를 제시해도 꿈쩍하지 않는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제안하는 내용이다.

논문은 심리학자들이 ‘the backfire effect’라고 부르는 현상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이 현상은 어떤 증거를 거부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증거가 제시될수록 더 강하게 거부하는 성향을 묘사하는 것이다. 증거를 위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게다. 아니면 (또는 결과로) 원래 입장을 변호하기 필요한 것을 쉽게 기억하고, (잘 기억해서) 능숙하게 설명/사용할 수 있는 것이 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연히 나도 포함해서) 분명한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바로잡기 위해 , 이 논문에서는, 정보 전달 방법을 바꾸는 제안을 한다. 소위 넛지(nudge)라고 소개된 방법을 사용하면 어떻겠냐는 것인데 저자는 “Nudges to reason”이란 이름을 붙인다. 어떤 수단으로 증거를 분명히 드러내서 사람들이 반응하기(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자는 것이다. 윤리학적 관점에서 불편하게 보인다. 이게 타인을 자율적 주체로 대하는 것 맞나?

먼저 생각할 것은 넛지를 정보 조작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정보 제공방식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두번째는 이 정보를 통해 행위를 ‘조작’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율성을 ‘신장’시키는 것인가. 세번째는, 자율성이라는 입장에서는 고약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넛지를 통해 그 대상의 이익을 보장하는 (또는 피해를 예방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생명윤리의 어떤 문제는, 줄기세포, 하이브리드 동물, 연명치료… (논변을 포함한) 근거라는 것이 충분하지 않은 정보, 일방적인 정보, 또는 조작된 정보인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nudges to reason’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후기) 급히 “넛지”를 찾아 읽어 보았다. 한 구절이 강렬하다.

사람들은 완벽한 예측을 해야 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편향되지 않은 예측을 해야 한다.

이해상충

2009년에 의료윤리학회가 주도한 이해상충 연구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얼마전 미국 의사협회지에 이해상충이 다뤄진 것을 보니 추억이 살아난다.

참 열심히 공부했는데… 환자를 대상으로 만든 깔끔한 자료가 인상적이다.

http://jamanetwork.com/journals/jama/fullarticle/2623608

PS. 데츠카 오사무의 아톰에는 로봇 레슬러들의 에피소드가 있다. 그 에피소드를 리메이크한 “플루토”는 인간성을 재미있게 해석하는데, 인간성을 “편향”으로, 그 편향이 감정때문에 생긴다는 게다. 인간 본성이 치우칠 수밖에 없다면,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차꼬도 함께 받아들이면 어떨까?

아이의 죽음에 관하여 

사무엘하12장 아이의 죽음을 두고 다윗이 기도하고, 받아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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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께서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아 준 아이에게 중병을 내리셨다. 다윗은 식음을 전폐하고 베옷을 걸친 채 밤을 새우며 어린것을 살려 달라고 맨땅에 엎드려 하느님께 애원하였다. 늙은 신하들이 둘러서서 일어나라고 했으나, 그는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더불어 음식을 입에 대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기는 마침내 칠 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다윗에게 아기가 죽었다는 것을 차마 알리지 못하고 수군거렸다. “아기가 살아 있을 때에도 우리 말을 듣지 않으셨는데,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면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는 아이가 죽었음을 알아 채고 아기가 죽었느냐고 물었다. 신하들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다윗은 땅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목욕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 야훼의 전에 들어가 예배를 올렸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 와 음식을 차려 오게 하여 먹기 시작하였다. 신하들이 물었다. “아기가 살아 계실 때에는 잡수시지도 않고 아기 생각만 하며 우시더니, 막상 아기가 돌아 가시자 일어나셔서음식을 드시니 어찌 된 일이십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그 애가 살아 있을 때 굶으며 운 것은 행여 야훼께서 나를 불쌍히 보시고 아기를 살려 주실까 해서였소. 아기가 이미 죽고 없는데 굶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내가 굶는다고 죽은 아이가 돌아 오겠소? 내가 그 애한테 갈 수는 있지만, 그 애가 나한테 돌아 올 수는 없지 않소?” (공동번역 사무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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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설교 시간에 이 본문이 소개되었다. 설교 내용은 잊었지만 이 이야기는 잊지 못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세상을 떠나는 이 짧은 일주일 동안 아비는 느꼈을 공포를 생각한다. 하느님의 유죄 판결과 처벌을 듣고 먼저 닥쳤을 막연함.
아이가 죽을 것이라니? 이 선고 이후 출산을 기다리는 기쁨은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로 바뀌었다. 그렇게 기쁨이 죽음으로 바뀐 후, 다윗의 영혼도 시들어 갔으리라. 나와 닮은, 내 본질이 죽기 위해 태어난다니.
아담이 아내를 만난 후 고백했던 “내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라는 말은 흥미롭게도 자식에게도 적용된다. 남자는 자식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다윗이에게는 이 기쁨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아이에게서 발견하게 될 것은 자신의 죽음이다. 이전에 대언자가 했던 말은 허공에 흩어졌으니 내가 잊어버리면 허황하게 지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병든 아기를 보는 그 순간 죽음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절대 빗나가지 않는 심판! 아이는 그를 닮았고, 다른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아이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울며 매달렸던 것은, 세상을 스쳐지나는 어린 영혼의 장례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아이는 죽음을 슬퍼할 사람이 부모 말고는 없으니 내가 미리 슬퍼하며 장례를 치르자, 혹시 죽음을 슬퍼하는 조물주가 이 서글픈 장례를 보고, 나의 슬픔을 보고, 마음을 돌이키실까, 이런 말도 안되는 희망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아이가 죽을 병에 걸렸다. 아이에게 왜 그 불행이 닥쳤는지 성경의 설명은 부적절하지만 – 갓 태어난 아이의 병보다 불공평한 것이 있을까? 내겐 어린 아이의 죽음같이 분한 일이 없다.
그러나 구경꾼이나 화를 낸다. 아비는 분노할 힘이 없다. 아이와 함께 죽어 갔으니, 아이가 누리지 못한 시간을 애곡하고 있었으니, 아이를 돌려달라고 – 사실은 자기 생명을 돌려 달라고 간절히 빌고 있었으니.

이 이야기는 다윗의 성공담으로 이어진다. 솔로몬이 태어나고, (버림받지 않은) 사랑받은 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국가는 강성해졌다. 그러나 다윗이 죽은 아이를 잊었을까? 다윗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그 애한테 갈 수는 있지만, 그애가 나한테 돌아 올 수는 없지 않소?” 그의 남은 삶은, 이름도 없이 세상을 떠난 아이에게 돌아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널리즘과 휴머니즘: 무엇이 우선인가?

이 사진을 기억하는가?

기자정신으로 안전하지 않은 곳을 돌아다닌 존 카터에게 퓰리처 상을,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비난을 안긴 사진이다.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관련기사). 그에게 쏟아진 비난은 죽음을 앞둔 아이를 버려둔 채 달려가는 저널리즘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안전 문제 때문에 현지인과 접촉하지 말라는 활동가의 지시가 있었다고 자신을 변호했지만 그 변호는 완전하지 않았다.

JTBC 기자가 정유라의 은신처를 신고하고, 다시 그의 검거 현장을 촬영했다. 그리고 심각한 저널리즘의 위기라는 경보가 울린다(관련기사). 이번에 그가 받는 비난은 존 카터의 경우와 정반대이다. 어떻게 기자가 자신이 개입한 사건을 보도할 수 있는가? 이 비난은 기자는 객관적이어야 하고, 그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자연인으로서 갖는 의무를 버릴 수 있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사실 이런 중립성 때문에 기자들은 분쟁지역에서도 기사작성의 자유와 안전을 보호 받는다.
그러니 아마 기자는 곤경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jtbc의 보도를 거북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생겼는지도 모르니. 그는 보도의 원칙을 어긴 사람이다.

모든 ‘전문직’은 섬세한 윤리의식을 발전시키고, 전수한다. 이번 사건은 저널리즘의 문제다. 그런데 이 보도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라는 큰 그림의 일부였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다른 전문직의 일탈을 발견한다. 의사, 고위공무원, 투자가… 그들 나름대로 전문직의 에토스가 있었다. 환자의 비밀을 지킨다, 조직의 안위를 유지한다, 정보원을 보호한다. 어느 하나도 인정되지 않았다. jtbc의 그 기자가 저널리즘의 에토스를 유지했다면, 그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까?
나는 다른 사건도 기억한다. 삼성이 검사들에게 떡값을 제공해 왔던 사실을 고발했던 MBC 기자들, 변호사 김용철… 이들 역시 언론윤리와 법조인 윤리를 근거로 호되게 비난을 받았다. 결국 그들은 전문직 내에서는 배제당하는 길을 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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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에는 인도주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주권국 사이의 불간섭은 인도주의의 문제에까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해다. UN 평화유지군이 인도주의원칙에 의존해서 파병된다. 인권의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전쟁을 불사하는 태도 문제다. 이렇게 한 영역 안에서 유지되는 원칙이라도, 심지어 현실적인 이유로 유지되는 경우라도, 그 원칙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존 카터는 생명의 문제 앞에서 저널리즘을 포기했어야 했다. 대기업의 조직적 부정 앞에 법조인은 고객의 비밀을 지킬 의무에서 면제받는다. 최순실과 박근혜의 문제 앞에서 기자는 대체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나? 그의 행위는 더 앞선 가치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그의 처지를 동정한다. 저널리즘 원칙을 지켰어도, 정의감에 따른 행동을 했어도, 그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쪽을 잡았어도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딜레마다. 돌진하는 황소의 뿔은 어느 한쪽을 잡아도 찔릴 수밖에 없다. 기자가 처한 곤경과 그의 시대에 유감을 먼저 표하라. 그리고 그의 시대는 윤리의 한계이기도 했음을 인정하자.

호모포비아와 죽음의 정치

미셸 푸코의 “죽음의 권리와 삶에 대한 권력(여기 번역본 링크)”을 읽고 있다. 이 논문에서 특히 관심을 갖게 된 주장이 있다. (섬세한 주장을 뭉뚱그리면) 그는 현대 사회가 더 이상 주권국가의 존립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고 본다 (아직 대한민국은 그렇다). 주권이 아니라면 개인의 삶의 기반을 제약할 수 있는 긴급한 상황이 있는가? 바로 우리의 생존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이다.

이 글을 읽다가 이 논리가 자꾸 HIV/AIDS를 들먹이는 호모포빅의 논리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강 이렇다.

우리와 다른 그들 – 죽음의 질병을 퍼뜨리는 자들- 우리 ‘종족’의 생물학적 위기 – (수사학적 도구로서) (동화를 호소하는 제스처와) 배제 필요성 설득 – 제노사이드의 욕망 실현

최근의 개신교 서클내에서 돌아다니는 논리는 특히 HIV/AIDS 확산의 주범으로, 우리 사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악으로 설정하는데 집중하는 것 같다. 이 논리에는 헛점이 많기도 하지만 이미 사회가 작동하는 논리라는 점에서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정도까지만.

인종평화는 가능할까?

페이스북 링크를 통해 블로그 기사 하나를 읽게 되었다. 상당히 자극적인 제목 “백인 미국인은 한국인을 어떻게 볼까?” 그리고 기분이 나빴다. ‘그럴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 일지 몰랐다.’라는 심정일까?

연구실로 오가는 길에서, 이 기사 생각을 했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인간다운 감정’이 없다는 판단을 한다는 기사가 마음에 걸렸다. 내가 요즈음 외국에 거주하며, 감정을 쉽게 교류하지 못하고 있기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농담의 코드가 다를 때도 있고,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도 다르고…) 그런데 감정의 교류라는 말은 주고-받는 상대성을 내포한다. 내가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도 관련있을 것이다.
나 역시 외국인을, 백인 흑인 인도인 심지어 중국인까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적 있다. 왜 미안해 하지 않을까, 왜 이런 상황에서 좋아할까?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이 사람들이 사람이 아닐 수 있다(subhuman)는 인식을 아마 PC(정치적으로 올바른)로 억눌렀을 것이다. 댓글의 인종차별과 비교되는 내 태도에 혹시 도덕적 우월감까지 느꼈을까?

기사만으로 이해가 어려워 인용된 논문을 검색해 보았다. 학술논문인데도 제목은 자극적이다. “그들은 우리를 사람 아닌 것으로 본다 (They See Us as Less Than Human…)” 논문은 3개 대륙(미국, 로마, 이스라엘)에서 수행한 연구를 바탕으로 기술했다. 결론은 다른 집단에 대한 인식의 왜곡이 상호간에 반복되는(reciprocal) 현상이라고 기술한다. 한글 기사가 이야기 하듯 무식한 미국인만의 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만으로는 반복되는 비인간화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물리력, 경제력 등에서 우월한 입장에 있는 인구집단이 먼저 보이는 태도에 비인간화를 경험한 집단이 상대를 비인간화면서 폭력이 정당화된다는 설명이 따른다는 점에서 시작 지점은 있다는 설명이지만)

현상은 기술되었지만 심리적 기전은 제시되지 않았다. 인간은 원래 배타적이고 공격적인데, 그 공격성이 가능하게 만드는 심리적인 기전이 저자의 비인간화인지, 이런 비인간화가 습득된 것인지 설명은 가능할지 모르겠다.
논문을 읽고 나면 마음이 서늘해지기는 하지만, 이 논문 자체에는 어떤 정치적 언급은 없다. 사실을 기록하는 단계 그 도덕적, 정치적 의미를 찾고 실천하는 단계가 별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한글로 쓰는 블로그이니 덧붙인다. 한국인은 너무 배타적이다. 백인이나 흑인이 지나가면 한 번 만져보고 싶지 않은가? ‘얘들도 사람인가?’
물론 사람같지 않은 한국인이 (많이) 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심지어 다른 한국인의 지도자로 자칭한다. 이런 자들에겐 분노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기독교 생명윤리

보건복지부가 임신중절시술을 한 의사에게 면허정지 처분을 내리겠다는 발표를 한 후(행정처분 예고 링크) – 이걸 저출산 정책으로 내놓는 어리석음이란- 낙태 문제가 제대로 공론화 될 것 같다. 우리 정부가 가진 인권의식 수준을 증명한 셈이다.
여성계와 의료계의 심각한 반발이 뒤따랐고(www.hani.co,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0102214005&code=940601) 정부는 부랴부랴 해명에 나서기는 했지만 (http://www.mohw.go.kr/front_new/al/sal0301vw.jsp?PAR_MENU_ID=04&MENU_ID=0404&page=1&CONT_SEQ=334871) 정말 이 정책이 가진 의미를 몰랐을까?

오늘 소위 기독교생명윤리를 한다는 이들이 이메일을 돌렸다. 내부 문서지. 나는 빼달라고 분명히 이야기 했음에도 나를 포함해서 돌리는 이메일. 낙태 문제에 대한 입장을 수립해야 한다는 젊잖은 이야기. 성숙한 태도와 포용의 제스쳐.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여성성에 대한 폭력. 기가 차서 지웠지만, 곧 다시 복구시켰다. 이런 자료를 지워 둘 수 없어서. (이런 이메일 내용은 기본적으로 비밀을 지켜야 하는 것이니 여기에는 적어두지 않겠다만…)

이 참에 기독교 생명윤리에 관해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기독교는 생명윤리 문제에 어떤 우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는가? 예를 들면 성경에 생명윤리문제에 관한 구체적이며, 오늘날의 지식에 부합하고, 맥락적으로 해당 생명윤리 문제를 직접 다룬, 그런 구절이 있는가 하는 말이다.
성경에 있는 소위 율법은 오늘날 구속력을 상실했다. 십계명 정도가 상징적으로, 일반적인 수준에서, 구속력을 가지고 있을뿐.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생명윤리에 관해 최종적인 규범을 가지고 있다 주장할 수 있을까?

정직한 기독교도라면 이렇게 이야기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 문제가 있군요.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과 사회관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는 것이 옳습니다 정도. 많은 의견 중 하나로. 다만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 생명윤리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을 향한 윤리적 지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보적인 입장을 가져서는 곤란할 것이다.
문제는 확성기의 방향을 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80%에 해당하는 사회 일반을 향할 때 발생한다. 꾸짖는 태도, 비난하는 태도, 정확한 근거 없이 주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기독교의 설득력을 약화시킬 뿐이다. 내 고민은 여전하다. 기독교의 설득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무당, 목사, 합리성에 관해서

 

최근 드러난 청와대의 의사결정과정에 모든 국민이 분노했다. 진실을 드러내어 알리고, 책임을 묻는 일을 국민이 직접 챙기게 생겼다. 명문대학의 학사관리가 공정하지 않다는 문제제기로 시작되었고, 여기에 관련된 어떤 일가가 알고보니 공공의 자원을 사유화하고 있었고, 그것이 사소한 측근 비리가 아니라 대통령의 의사결정때문에 생긴 일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국정이 무당에게 놀아난 셈이라니!

이 과정 모두가 합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보다 한국 사회의 종교성을 걱정하게 된다.

1. 개인적 일탈을 밝혀내야 할 제도와 제도의 관리자들이 사실은 공범이었다.
제도의 문제인지,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문제인지. 만약 학사 관리제도가 작동하지 않고, 사법제도의 견제 기능이 거세되었으며, 공직자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을 충성의 대상으로 생각했기에 문제가 생겼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범죄를 행위자의 문제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지금까지 반복된 비리와 공권력을 덮어쓴 야만의 확대/변형이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런 수준의 개인이 공직을 차지하게 되어 있는 제도다. 고시-정부주도의 경제/사회구조-경쟁과 적대관계로 구성된 인간관계. 끔찍한 상상이지만 이런 구조가 존속하는 한 이런 ‘개인적’ 일탈은 반복될 것이다. 우리 제도는 총체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2. 협박을 통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제도가 개인의 합리성을 보장할 수 없게 된 사회에는 합리적으로 승인받았다는 의미에서, 정당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당한 권력이 없는 세계는 토머스 홉스의 표현을 빌리면, 야수들이 벌이는 전쟁상황이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들 사이의 먹이사슬이었다. 국민 위에 앉아 있던 그들도 먹이사슬을 구성하는 일부에 불과했다는 사실. 국민을 겁박하는 그들 자신도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 이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달성한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는 수십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제도는 이런 문제 앞에 속수무책이다.

3. 대화와 합의가 아닌 믿음이 정치적 결정의 배후에 있다.
우리는 가장 큰 권력을 행사했던 자가 신앙의 허울을 덮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당 놀음이 이 모든 불합리를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 탐욕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은 자뭇 충격적이지만. 무속신앙이라는 말로 그들의 모든 죄를 설명할 수 있을까?

무속인이 아니라 기성 종교인이 대통령을 보좌했다면 우리는 조금 덜 화가 났을까? ‘건전한’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대로 된 교회를 목회하는 남자 목사였다면? 신앙의 도리를 대통령에게 조언하고 대통령이 그의 조언을 따랐다면? 이런 종류에 우호적일 개신교인들은 무엇이라 말할까? 솔직하게 기독교가 바라는 정치참여가 이런 모습은 아닌가? 그 자리를 유사 기독교가 (기독교와 같은 구조를 가졌다는 점에서) 차지했다는 점을 분하게 느끼고 빼앗으려 할까?

신앙은 합리적으로 구성된(끊임없이 개선된다는 가정하에) 제도를 대신할 수 없는 것 같다. 무슨 이유인지 아직 확실하게는 모르겠으나 종교적 원리는 다원화된 사회를 이끌 능력이 없다. 목적과 수단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종교의 특성과 무관한 것 같지 않다. 그것이 내가 최순실 사건을 보면서 갖게 된 불안함의 한 단면이다. 우리 민족은 지나치게 종교적이다.

If I Could Tell You (Wyston Hugh Auden, 1940)

# If I Could Tell You (Wyston Hugh Auden, 1940)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Time only knows the price we have to pay;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시간이 조금 나면 시나 소설도 좀 읽고 글을 남겨두려 했습니다. 그게 몇 달이 지나서야 되네요. 영국 시인 오든(W H Auden)의 시를 처음 올립니다. 우리 말로 잘 번역된 것을 찾기 어려워 직접 번역하는 만용을 부렸으니 이해해 주세요.

시간은 아무말도 하지 않으리라.

내가 말할 수 있다면 (W H 오든, 1940)
시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시간만이 우리 갚을 대가를 알고 있다.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을 것이다.

어릿광대가 놀음을 시작할 때 울어야 할지,
음악가가 연주할 때 더듬거려야 할지,
시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말했다.

말할 수 있는 운명이 더는 없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말보다 품은 사랑이 더 크기에,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올 때, 시작한 곳 어딘가 있으리라.
잎새가 마를 때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시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장미는 진정으로 자라고자 할 것이다.
환상은 환상으로 머무르기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으리라.

사자(獅子)들이 일어서 어디로 가고
멈추지 않는 흐름과 용사들이 멀리 사라진다 해보자.
그때도 시간은 아무 말 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고 할까?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으리라.

——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으리라.

2차세계대전의 참화 속에 쓰여진 시. 젊은이들의 죽음을 경험한 , 그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살았기 때문에 경험한 아이러니를 담아낸 시. 진실 혹은 진리는 답하지 않는 현실의 무게.

“Time only knows… but will say nothing.” 우리는 진실에게서 어떤 감정도 위로도 기대할 수 없다. 진리는 저기에 그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위로를 구하지만 차가운 대답만이 돌아온다. 게다가 시간이 전하는 깨달음이란, 대책을 세울 수 없는 것. 막상 닥친 후에야, 그렇게 되고 난 후에야 ‘그렇구나’라고 탄식하게 되는 것. “I told you so.” 혹시 우리가 살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대가를 알면 심판의 순간을 피할 수 있을까? (이 말을 하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다. 아마 신(神)일 수도 있다. 그렇게 엄숙하기에 우리는 아무 대답을 찾을 수 없으리라).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은, 답을 하려 애쓰지만 그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할 뿐이다. 그리고 이 무지의 고백이 이 시를 끌어가는 주제다. 물론 사랑으로 (4연) 극복을 시도하지만 시인-인간은 역부족이다 (2-6연의 중심에 4연이 자리잡고 있다. 4연은 인간성의 상징이다).

2연. 죽음은 젊음과 노인의 시절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기에 우리는 어릿광대를 보고 깔깔대는 아이를 보면서, 혹은 노련한 음악가의 연주를 보면서 울지, 혹은 아연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3연. 찰나에 불과한 우리 인생도, 그 인생의 사그러듦도, 세상 모든 것에는 까닭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나, 나 역시 모른다고 고백할 밖에.

5연. 젊음의 아름다움 (roses)도 노년의 변화도(vision) -환상은 노년의 것이다. 젊음은 그 아름다움에 자신을 질식시키기 마련이기에, 변혁은 노인의 것이다 (기독교적 비전)- 그저 머무르다 떠나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고 싶어하는 우리지만, 어떻게 하겠나.

6연. 운명에 저항하는 일을 결국 멈출 것이다. 사자도 용사도 멈추지 않는 흐름마저도, 모든 것이 떠난 후에도 대체 무엇이 남을까? 그렇게 저항하지 않는다면 시간의 엄숙한 선고는 그 힘을 갖게 될까? 그리 되기를 바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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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I Could Tell You (Wyston Hugh Auden, 1940)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Time only knows the price we have to pay;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If we should weep when clowns put on their show,
If we should stumble when musicians play,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If we should weep when clowns put on their show,
If we should stumble when musicians play,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There are no fortunes to be told, although,
Because I love you more than I can say,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The winds must come from somewhere when they blow,
There must be reasons why the leaves decay;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Perhaps the roses really want to grow,
The vision seriously intends to stay;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Suppose the lions all get up and go,
And all the brooks and soldiers run away;
Will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