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는 일의 본질에 관해서 (아직은 문제제기)

아프리카는 모든 자원이 부족하다. 역설적으로 자연자원이 풍부해서 그렇다.
자원의 부족 중에 가장 근본적이며 심각한 문제는 지식의 부족, 그 지식을 담고 실현하는 인력의 부재다. 의료도 비슷한 상황일터.

GE가 흥미로운선언을 했다. 인공지능과 전산화를 이끄는 첨단 의료기기 회사답게,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의미에서(최선의 해석), 아프리카 지역에 원격의료 + 인공지능 진단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던 global bioethics 블로거는 더 많은 진단을 제공하는 것이 근본부터 박탈 당한 아프리카의 보건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며 회의적이다.
나는 좀 더 비판적이다. 치료가 없으니 그리고 무상으로 제공되니, 그래서 손해 볼 사람도 없으니, 의료분쟁을 포함한 법적 책에 엮일 가능성이 0에 가깝다는 점에 특히 의심이 든다.

손해 볼 사람이 없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진단도 치료도 받지 못하는 인구집단에 진단을 제공한다는 것은 최소한 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업을 통해 누군가 이익을 얻는다면, 결국 이 인구집단은 정보를 제공하는 실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실험 대상이 된다고 뭐 그리 대수일까?
게다가 GE는 이들의 빈곤에 책임을 질 필요도, 가능성도 없다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자본주의가 아프리카 빈곤의 원인을 제공하긴 한다. 그러나 그 책임은 도덕적인 책임에 머문다). 게다가 GE는 책임을 묻기 힘든 집합체다(collective entity).

지금껏, 앞으로도 계속 빈곤할 가능성이 높은 아프리카를 ‘보건’이라는 영역에서 돕는 것은 어떤 가치를 갖는가? 어떤 방식으로 지원해야 하는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장기적인 관점을 수립하는 것이 전문가의 영역에 속하게 된 상황에서, 원래 인간의 일이란 단기적인 처방인 경우가 많고 치기, 혈기, 이기심과 이타심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근본적인 원인에 접근하는 도움은 대체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지.

이렇게도 되는구나

이게 배경이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개혁주의라는 신념으로 무장해서, 아무 말이나 아무 사람이나 물어 뜯으려 으르렁댄다는 사실이다.

바르트부터 시작해서 최근에는 김세윤, 톰 라이트 같은 대학자들까지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비방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니 조무래기 목사들이야…
[부활 신앙 간증’ 시리즈로 유명한 춘천 한마음교회(김성로 목사)]도 화살받이가 되었던 듯하다.

——
그런데 그 교회에 출석하는 구원받은 탈동성애자가 있나보다. 유튜브에 간증도 올라가 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이를 한 언론사가 인터뷰했다. 평소 ‘반기독교’라고 비방받던 이 인터넷 언론사에 이런 기사가 실렸는데, 댓글이 재미가 있다.

 


간증을 강조하는 목사의 신학에 대한 비난이 있었을텐데 그것은 없어지고 탈동성애를 기사화 했다는 것, ‘복음’이 동성애도 이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개가가 울린다.

여기서 깨달았다. 동성애는 신학의 장벽도 무너뜨리는구나. 아주 흥미롭다.

아이러니

오늘 가톨릭의대에서는 ‘장소만’ 빌려서 환자연명의료결정법(이것이 공식 약칭이다)에 관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팻이 주제 강연을 하는 모임. 한국에서는 암센터의 장윤정 박사가 몇 가지 고려 사항을 발표했다.

팻은 아주 현명하게 본인이 가톨릭신자임을 알리고, 어머니를 모시는 과정에서 MOLST가 도움이 되었다고 강의했다. Okay,
장윤정 박사의 약력을 듣는 순간, ‘악! 이 사람이 석사를 가톨릭대에서 했구나. 가뜩이나 포악한 가톨릭 생명윤리의 영향을 받았으면, 대체 발제가 어떻게 될까?’라는 걱정을 했고…

그러나, 예상 밖의 분명한 메시지. 가톨릭이 관철시켰던 몇 가지 문제들과 법이 혼란을 야기한 내용들, 입법 과정 마지막에 두 법을 억지로 붙여 놓은 이들에 대한 따끔한 문제제기!

그러나 진짜는 토의 시간에 있었다. 삶의 질에 대한 그 낡은 이동익 신부의 논평이 끝난 직후, 노유자 수녀가 삶의 질을 왜 이야기 하지 않느냐, 어떻게 삶의 질 고려가 빠지는가 라는 내용으로 응답했다. 물론 ‘개인적 의견’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오전 세션이 끝나자, 윤영호 교수가 앞으로 달려가고 이동익/윤영호/노유자의 나는 잘 모를 논쟁이 벌어졌다. 깨지지 않을 것 같던 벽이지만, 균열은 이미 깊었다. 그것을 회칠해서 감추어 두었을 뿐이고.

전해 듣기로는 장윤정 박사는 이 발제 준비하며 대상포진이 생겼다고 하고, 본인은 발제 마지막 시점까지 몇번을 고쳤다고 한다. 대체 학자의 논의까지 자기검열하게 만드는 이 종교란 무엇인가. 그게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인가?

젠더, 계급, 병

1.
강남에서 여자라서, 쉬운 상대여서, 한 사람이 찔려 죽었다.
그 범인은 여자들에게 무시당한 것이 화가 나서 아무나 죽이고 싶어서 그 여자를 죽였다며 자신도 보호하지 못하는 발언을 했다. 양심도 없는 것 같지만,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는 불우했다. 언제 발병했는지는 아직은 모르나 늦어도 이십에 초중반에 시작된 병 때문에 시작할 기회도 얻지 못했으리라.
정신과가 고약한 것이, 증상이 문화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불우한 남자의 여혐은 (정말 ‘여혐’ 맞아? 이 행위를 해석하는 여혐들이 있는 것은 아니고?) 여자를 대상으로 보는 시선의 반영일 수 있다. 죽은 여성은, 희생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된 못된 남자도 희생자다. 그렇게 되면 누가 가해자냐고 묻는 이가 있을 것이다. 정말 가해자가 구체적으로 존재해야 속이 편하겠냐? 그럼 나는 괜찮다고 다릴 뻗고 잘 수 있겠나?

2.
나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달려오는 차를 무서워하고 싶지 않다. 솔직히 걸어서 다니기엔 우리 길은 안전하지 않다. 오늘도 어제도, 조금만 생각하면 남자 운전사만큼 여자 운전사도 보행자에게 무자비하다. 예컨대 남자도, 여자도 핸들을 쥐면 혐오스러운 것이 똑같다. (여자가 남자를 배운 것이 아닌가)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무례한 것, 상스러운 것이 남녀의 차이가 있나? (된장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그런 종류가 있다. 이걸 먼저 말하겠다) 공공장소를 구별못하고 큰 소리로 통화하는 데 남자 여자가 다르던가? 조금만 권력이 있으면 오만 패악질 하는 것이 남녀가 다른가? (여성이, 여성이라는 젠더 때문에 이런 폭력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젠더와 무관하지 않지만, 일차적으로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에, -추가로 사람을 직접 만나는 자리에- 있기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사회는 타인을, 특히 물리력뿐 아니라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을, 권리를 가진사람으로 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사회가 구조적으로 악한 것이고 그래서 자꾸 희생자가 나온다. 주로 여성들이 그 희생자다. 남자도 종종 희생당한다.

3.
남자도 희생당하니 이번 반응이 호들갑스럽다는 말이 아니다. (여자라는 구체적인 특징을 가진) 인간으로 시각을 넓히자는 말이다. 소외당하고 피해를 입지만 문제 해결을 요구할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사회가 되어진 이 모양 이 꼴이 대적할 악이라는 생각하자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성적 폭력을 이해하자는 말이다. 남 – 녀의 프레임이 아니라. (누가 이런 프레임을 제기하고 왜 낚이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4.
칼을 들고 희생자를 물색했던 그 남자로 돌아가자. 그이가 치료받지 못하는,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병자였다는 점을 생각하자. 망상이, 망상의 해결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틈을 따라 지표면으로 흘러 나왔음도 생각하자. 그가 어떤 벌을 받을지 모르겠다. (나는 우리 법원이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 해본 적 없다. 특히 성이 관련되면)
그러나 나는 그에게 치료 기회가, 재활의 기회가 제공되길 조심스럽게 기원한다. 가해자를 희생자로 둔갑시키는 궤변이 아니길 빈다.

informed consent: 진정성에 대해서

우주를 한자로는 宇宙라고 쓰고 하늘로 뜻을 붙인다. 이 개념을 영어로 번역하면 the universe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정관사 ‘the’에 관심을 갖는다. the 가 붙는 순간 누구라도 알고 있는, 그리고 확정된 대상이 된다. 그렇게 universe는 누구라도 알고 있는 공동의 대상이 된다. 이 하나의 단정적인 우주는 동시에 한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이 세계를 보는 단 한가지 시선, 누구라도 알 수 있고, 공유할 수 있으며, 기준이 되는 그런 우주.

 

그러나 이 세계를 보는 시선은 하나일 수 없다. 내 은사와 길을 걷다가, 한국에만 있을 법한, 다리가 없는 걸인을 만난 일이 있다. 그는 걸인이 보는 세계의 높이를 동정했다. 그를 보는 시선과 그의 시야, 아마 다리만이 보일, 그리고 뒤따르게 될 궁핍한 세계. 그의 세상은 두 발로 걸어다니는 사람의 세계와 다를 것이다. 병에 걸렸거나, 빚이 있거나, 도덕적인 문제에 봉착했거나… 세계는 제한되고, 우리는 다른 세상을 보고 경험한다. 그게 그의 우주다. 예컨대 우주는 하나가 아니고, 개별의 우주, a universe로 존재하고 있으며, 인간의 관계는 universe’s의 세계인 것이다. 이미 우리는 물리학에서도 그런 다양한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

김훈은 젊은 의사와의 만남을 이렇게 한탄한다.
“나이를 먹으니까 병원에 갈 일이 점점 많아진다. 눈도 침침하고 허리도 쑤신다. 지난 한 해 동안에도 병원에 가져다준 돈이 수십만 원이 넘는다. 나는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소독약 냄새에 진저리친다. 소독약은 우월성의 냄새를 풍긴다. 소독약은 내 몸 속의 병균을 적대시하고 경멸하는 듯한 냄새를 풍긴다. 병원은 늘 살균되어 있다. 젊은 의사는 나에게 ‘어디가 아프냐’ ‘얼마나 아프냐’라고 묻는다. 병은 나 자신의 생명 속에서 발생한 실존적이고도 사적인 현상이다. 내 병은 나의 생명현상인 것이다. 나는 나의 병을 나 자신의 몸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 나는 나의 병을 객관화하지 못하고 대상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젊은 의사는 기어코 나의 병을 객관화하고 대상화하려고 덤빈다. 아마도 나의 병을 대상화시키지 않으면 의사는 나의 몸에 손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옷을 치켜올리고 의사에게 내 맨 몸을 내맡길 때, 나는 내 병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 나의 이 속수무책을 슬펴한다. (김훈, 질병의 개별성과 의사 – 환자 관계의 직접성. in 마종기 외. 의학과 문학 2004)”

서로 다른 두 우주의 만남에서 한 편은 다른 편의 이해를 인정할 생각이 없다. 아마 두 우주가 동일한 관점을 제공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의사가 제시하는 질병과 치료의 설명이, 환자의 우주에 대한 설명에 맞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우주의 주인이 (또는 해석자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받아들일만한 것을 제공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informed consent가 가능해 질 것이다. 시작일 뿐이라도

[이것을 조금 더 발전시켜 볼 요량이다. ]

호스피스-연명의료법

지난 4월 6일 호스피스-연명의료법에 관한 토론회에 다녀왔다. 당시 적어둔 토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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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의료결정법 이후의 과제

이일학.
연세의대.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

 

앞으로 더 발전할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하려 합니다.
저는 호스피스-완화의료와 연명의료결정의 관계, 여기서 파생되는 죽음의 준비 필요성 그리고 시행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병원윤리위원회의 문제를 다루고 마지막으로 입법 과정에서 발견한 우리 사회의 모순을 짧게 언급하려 합니다.
이것들을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이 사실은 연속선 상의 한 순간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호스피스는 연명의료결정의 대안이 아니다

이 법은 완화의료와 연명의료결정을 동시에 다룬 법입니다[1]. 이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은 임종을 앞둔 동료 시민을 돌보는 사회의 태도라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이 법은 보건의료서비스가 돌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의 발로일 수 있고, 죽음의 시기와 인격의 존중방안을 둘러싼 논쟁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법이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적인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이 법의 입법과정을 지켜보면서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법 안에 모든 것을 담아내기 보다 입법 과정에서 확인한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담은 제도를 운영할 방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입장에서든 최대한 받아들일 만할 것은 완화의료가 임종 환자 돌봄의 합리화에 있어 선결조건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임종환자 돌봄의 모든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연명의료결정이라는 측면에서는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어떤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건강을 유지하다 한 순간에 꺼지는 것을 이상적인 죽음으로 여기고,
그렇게 죽음을 최대한 뒤로 미루었다가 조금만 경험하기를 바라지만, 이런 우리의 바램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떨쳐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증명할 뿐입니다. 실제로 죽음의 과정[2]은 더욱 길어지고 있을 뿐입니다[3].
예,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호스피스-완화의료가 약속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흥미로운 역설을 낳습니다. ’건강한’ 노후의 경우, 이 건강한 노인은 병마에 고통을 받지 않는 한 죽음의 과정에 적극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령으로 인한 죽음의 순간에는 결정이 불필요할까요? 이법이 목표의 하나인, 중요한 성취라고 할 완화의료에서조차, 생각해 보면, 이 문제가 여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호스피스 케어를 받는 이들은 죽음의 결정에서 면제됩니까? 우리는 호스피스라는 겉보기에 윤리적인 진료조차 윤리적 숙고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4].

죽음의 준비는 일찍 시작된다.

죽음을 준비하도록 돕는다는 차원에서 이 법을 포함해서 제도가 할 일은 건강한 노인을 포함하여 모든 시민이 삶의 어느 시점에서 죽음을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삶에 대한 주체적인 태도가 자연스럽게 죽음에 관한 결정으로 연장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너무 큰 문제와 연결됩니다.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묘수를 생각하기는 어렵겠지만, 노인의 복지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지 않고 의학적 처치, 의료서비스의 관점에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점의 한계는 분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의료기관 밖에서 시민들을 도울 방법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중요성을 재고해야 할 것입니다. 입법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제시된 관점에 대해 저는 의심을 갖습니다. 얼마만큼 확실하면 믿을만한 것인지, 모든 의심을 해결하는 방안을 법에 담으려 현다면, 법은무력해질 뿐입니다.
일찍 죽음에 대해 준비해야 하는 일에 관해 네덜란드의 보수적 생명윤리학자인 Ron Berghmans의 글을 인용합니다. 그는 임파선암을 치료받는 동안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경험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병이 진행될 수도 있고, 치료의 종결이 내 죽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 진 후, 내가 의식을 잃거나 의사결정능력을 잃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내 의학적 바램을 진술한 사전의료지시서의 초안을 잡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고 결정했다. 사전의료지시서를 아내와 함께 써내려가면서 우리는 생의 말기 치료와 의료에 관련해서 내 바램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기술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수용할 수 있는 의료와 받아들일 수 없는 의료를 서술하기가 특히 어려웠다.
사전지시서를 작성하는 동안 첫번째로 필요한 것은 생의 말기 의료에 관한 생각의 바탕이 되는 내 자신의 가치관을 인식하는 일이었다.
이 가치관을 인식하고 나니 의료인과 친지들에게 실질적인 지침을 주는 것이 가능해졌다. 나는 아내와 내 가치관에 관련되었던 모든 논쟁을 통해, 내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아내가 내 가치관과 바램을 바탕으로 하는 대리인이 되기 좋은 위치에 있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환자에게 가까운 사람이 관여하는 것이 생의 말기 의학적
(그리고 윤리적) 의사결정에 더 낫고 가치있는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환자의 염려와 바램을 아는 사람과 함께 공식적 사전지시서를 작성하는 이상적인 경우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5].

 

 

죽음에 대한 사회의 대응은, 병이 생기는 시점보다 일찍 시작해야하고, 시민들이 더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삶의 다른 영역과 관련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서는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할 동기를 부여할 뿐 아니라 숙고의 과정을 이끄는 지침의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종이 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동료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는 사람이 함께 대화하며 길을 열어가는 것이겠습니다.

 

병원윤리위원회

이 법에서 제시한 의료기관윤리위원회는 호스피스-연명의료의 제도화,
연명의료결정만큼이나 중요한 사안입니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는 그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고, 일부에서는 불신의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명의료결정이 제도화되면서 이를 지원할 조직이 필요하며,
교육-상담-조정-행정 업무를 포괄하는 기관이 의료기관 내에서 활발하게 기능해야 합니다.

윤리위원회의 발전에 있어서 고려할 것은 법이 지정하는 기능을 넘어서 기관 내에 설치된 서비스의 일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대부분 expert-advice, case-response 형태의로 임상윤리서비스를 이해하지만, 이런 관점에서는 이 법이 제시하는 보고 등의 과제조차 처리하기 어렵습니다.
clinical ethics consultation service라는 포괄적인 서비스 개념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 법률이 이 서비스 개발의 추진력이 될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법의 규정과는 별개로 임상윤리는 임상의료 서비스의 일부로 제공될 수 있고,
제공되어야 합니다. 의료기관에 따라 환자와 환자 보호자 지원으로 제공될 수 있고, 의료인의 윤리적 고뇌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로 운영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활동을 포괄한 서비스가 개발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권주의에 대한 의문

마지막으로 저는 소위 담론을 이끌어가는 이들이 지속적으로 표했던,
시민들에 관해 갖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부권주의에 의문을 던집니다.
duty to care(의료의 의무)나 생명의 보호 같은 캐치프레이즈로 이 법이 가진 부권주의를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이것은 우리 생명윤리학계의 담론구조와 무관하지 않고 학계의 안이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시민들이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정보를 추구하고 자신의 뜻을 실현하려 애쓰는 노력은, 부권주의적 관점에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결정권은 성인(聖人)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결정권은 우리가 추구할 도덕적 이상지만, 동료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나 자신을 포함한 동료 시민 중 자기결정권의 이상을 달성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시민으로서 자기결정권의 행사 조건은 필요한 정보를 이해하고, 필요한만큼 결정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 외국 판례의 일관된 이해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변화해야 할 부분도 있겠습니다만 이 법의 시행과정에서 아마 우리 사회가 깨져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이 법이 우리에게 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죽음의 결정은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의 깨달음입니다. 우리 사회의 공동의 노력이라는 점에서 이법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죽음에 관한 논의를, 사회적으로, 시작할 기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법의 통과 후 시민들의 반응을 보면서 발견하게 된 것인데, 연명의료결정법[6]이 죽음의 문제를 직면하도록 우리를 이끌었다는 것, 최소한 동기를 부여하거나 그런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을 기대합니다.

 

[1] 현장에서는 명칭에 대한 문의가 들어옵니다. 웰다잉법, 존엄사법,… 대체 무엇이 법을 잘 반영한 것이냐는 질문이겠습니다. 호스피스법도, 연명의료결정법도 아닌 제3의 명칭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2] 최근 구한 일본의 책자는 그 제목이 “죽음의 과정을 살다: 말기 암환자의 경험의 사회학”이라고 하여 건강한 시기 뿐 아니라 질병에 걸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삶의 어떤 시기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3] 건강하지만 죽음이나 중병의 공포를 떨쳐내지 못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Arthur Frank는 관해사회(remission society)라는 표현에 담아냅니다. 완치가 아니라 질병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이것은 암성질환에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고. 아서프랭크. (2013). 몸의 증언. 갈무리.

[4] Dickenson, D., Parker, M. (2001). The Cambridge
Medical Ethics Workbook. Cambridge University Press.에는 수술적 치료와 보존적 치료 사이를 오가며 치료를 결정해야 하는 환자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토론자가 경험한 병원의 사례 역시 호스피스 치료가 윤리적 고뇌에서 해방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5] Ron Berghmans. Illness, pain, suffering and the
value of life. in Dickenson, D., Huxtable, R., & Parker, M. (2010). The
Cambridge Medical Ethics Workbook. Cambridge University Press.

[6] 호스피스-연명의료법

의과대학생의 의료윤리

의과대학 2학년 OT 에서 학생의 윤리에 관해 짧게 이야기 할 기회가 생겼다.
보통은 보고서 작성에 관해서 이야기 하지만, 좀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여 검색하다 보니 UC Davis에서 간행한 학생윤리서약 (Medical Student Pledge of Ethics)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U Texas에서 개발한 것을 사용하는 것이라는 소개가 있었다.
한페이지짜리 문건에 학생의 윤리문제를 잘 다룬 것 같아 이 내용을 소개하면 어떨까 싶어 번역해 보았다.

  • 명예로운 권리과 책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나는 훈련받는 의사이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돌보는데 헌신하였다.
  • 배움에 있어 정직함과 고결함을 지킬 것이고 환자-교수-동료에게서 배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
  • 전문가로서 최고의 행위기준을 유지할 것이다. 
  • 내가 직접 확인한 것만을 보증할 것이며, 신체 검사에서 승인받지 않은 도움을 제공하거나 제공받지 않겠다
  • 선배 의사들의 지식과 지혜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 나의 약점과 강점을 인식하고 환자, 동료, 가족과 나 자신의 인정을 얻을 수 있도록 성품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환자의 인격, 권리와 결정을 존중하며 어떤 편견 없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할 것이다.
  • 환자의 비밀을 지킬 것이며, 언어와 행동을 적절하게 할 것이다.
  • 환자의 경험, 문화와 신념의 다양성을 존중할 것이다. 이 다양성이 나의 교육을 풍성하게 하며 진료 능력을 향상시킨다
  • 의학에는 과학 뿐 아니라 기예가 있음을 잊지 않을 것이다. 따뜻한 마음, 공감과 이해는 환자 진료의 본질이다.
  • 환자에게서 신뢰를, 사회로 부터 존중을 얻는 의료인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
  • ‘교육받는 의사’로서 내게 주어진 특권을 인식하고 남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 학생에 불과하지만 우리 사회의 건강 수준을 향상시키고, 의료의 접근성을 높이며, 의학지식을 향상시킬 책임이 있다. 
  • 새로운 책임을 받아들이며, 나의 건강과 행복이 중요함을 잊지 않겠다.
  • 지금까지 나를 돕고 앞으로 미래를 함께 할 이들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 나의 한계를 알아 인간애와 자비심으로 치료하고, 완화시키며, 편안하게 하는 법을 배우는 평생의 노정에 헌신하겠다.
  • 나의 명예를 걸고 엄숙하며, 자발적으로 헌신한다.

(원문 링크)

이 서약의 내용은 몇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 공부에 있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
– 전문가로서 (doctor-in-training) 걸맞는 진료 태도를 지킬 것
– 전문가로서 사회적, 공적 책임을 인식할 것
– 개인으로서 자신과 가족을 돌볼 것

그 기반은 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명예로운 권리라는 사실의 인식이다.
우리 대학도 입학 시점에서 이런 서약을 받으면 어떨까 싶다. 여기에 honor code를 덧붙여서…

죽음에 대한 법

법안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했다고 한다.
법안의 이름이 상당히 길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법안은 두 갈래의 목적을 두고 있다.
하나는 연명의료에 관한 것이고

연명의료에 대한 기본원칙, 연명의료결정의 관리 체계, 연명의료의 결정 및 그 이행 등에 필요한 사항을 정하여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을 제도화함으로써 환자의 자기결정을 존중하고 환자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며,

다른 하나는 호스피스-완화의료의 확대제공이다.

암환자에만 국한되어 있는 호스피스 서비스를 일정한 범위의 말기환자에게 확대 적용하도록 하고, 호스피스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근거 법령을 마련하여 국민 모두가 인간적인 품위를 지키며 편안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임.

 

해당 위원회를 통과한 것은 반갑지만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하는 일이 아직 남아있고, 하위법령을 개발하는 정말 복잡한 일이 남아 있다. 법안을 적극 지지했던 그룹과 내켜하지 않던 그룹이 정말 벼르고 있는 단계.

게다가 이 법이 통과되더라도 실행과정에 계속 문제가 생길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결국 우리나라의 사고는 사태를 범주로 나누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행위자의 합리성을 인정하고 그들이 고려할 가치와 준수할 절차를 지정하는 수준을 넘어서 이건되고, 저건 안되고… 시시콜콜히 지적하는 법률을 만들고 싶어했고, 이 법은 이도저도 아니게 그런 지시가 담긴 법이 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임종과정”을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로 함.

회생의 가능성, 회복되지 않음,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 사망이 임박. 언뜻 보기에는 별문제 없는 이 타협안은 실제 임상에서는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다. 치매, COPD, PVS, 뇌사… 결국 급속도로 악화되는 질병이 아닌 경우, 이 병들은 합병이 생긴 경우에만 이 법의 적용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에. 게다가 이 법이 적용되는 순간에도 중단할 수 있는 치료법이 한심할 정도로 제한되어 있어서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의학적 시술로서

결국 이법은 – 아무리 법이 호스피스의 확대를 선언하고 있다고 해도- 암에 국한된 법이 될 가능성이 너무 높다.

이 법이 시행되면 의료계는 여러가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서류작성부터 결정절차, 판단의 경험쌓기, 법적 함정을 피하거나/넘어지는 경험들… 그리고 시민들의 오해와 ‘종교계’의 항의와 정책적 무관심까지 거쳐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혼란은 의료계와 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수업료일까? 아니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너무 쉽게 타협한 다른 종류의 댓가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세대간 정의

세대간 정의라는 개념이 최근 회자되는 모양이다.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달라는 ‘노동개혁’ 주장과
투표소에서 1번밖에 모르는 노인들에게 애써 일한 것을 퍼줘야 되는 이유가 뭐냐는… 둘 다 노인과 젊은이들의 대결 양상이다.

이 대결에서는 노인들이 가져가는 것은 젊은이들이 빼앗긴 것이다. 이 논리를 정당화하려고 여기에 이상한 이론을 수입해다 덧붙인다. 존롤스가 이야기 했다는 intergenerational justice다. 정말 존 롤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미안한데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살펴보았던 롤스도, 세대간정의의 논쟁을 시작했던 파핏(Parfit)도, 분배문제의 대가 배리(Barry)도 우리의 논객들이 펼치는 방식대로 세대간 정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이 이해한 대로라면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같은 세대다. 즉 세대는 나이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굳이 우호적으로 설명하자면 세대간 정의를 “동시간대 세대간 정의(intratempral, intergenerational justice)”와 “시간차 세대간정의(intertemporal intergenerational justice)”로 나눌수도 있겠다.

이 구분 내에서 동시간대 세대간정의는 복잡하지 않은 분배문제다. 일하는 세대가 만들 수 있는 자원을 각 연령대별로 어떻게 나눌 것인가. – 이걸 복잡하게 만든 것은 없는 예산 끌어다 수당을 만든 그녀다-의 문제일 뿐. 노인에게 가야 할 예산은 일부 젊은이들에게 돌아가야할 몫이다. 이 문제는 분배의 문제고, 분배는 정치의 본질이다. 근로자들이 노인들에게 어떤 빚을 져서 갚는 게 아니라 동시대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돕는다는 말이다.

거창하게 끌어다 쓴 롤스의 논의는 미안한데 시간차 …, 바로 두번째 정의다. 그리고 여기에는 복잡한 이론이 있어 담기어렵다. 다만 오늘 이야기 하려 했던 것은, 지금 세대간 갈등은 어떤 윤리적인-당위적인 요소가 담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대간의 갈등이 아니라 증세를 통해 풀어갈 문제라는 것이고, 나이들었고 지금 일하고 있는 세대가 미래의 세대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다고 우길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http://plato.stanford.edu/entries/justice-intergenerational/#RawJusSavPri를 읽어보시라.

세대간 정의

세대간 정의라는 개념이 최근 회자되는 모양이다.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달라는 ‘노동개혁’ 주장과
투표소에서 1번밖에 모르는 노인들에게 애써 일한 것을 퍼줘야 되는 이유가 뭐냐는… 둘 다 노인과 젊은이들의 대결 양상이다.

이 대결에서는 노인들이 가져가는 것은 젊은이들이 빼앗긴 것이다. 이 논리를 정당화하려고 여기에 이상한 이론을 수입해다 덧붙인다. 존롤스가 이야기 했다는 intergenerational justice다. 정말 존 롤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미안한데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살펴보았던 롤스도, 세대간정의의 논쟁을 시작했던 파핏(Parfit)도, 분배문제의 대가 배리(Barry)도 우리의 논객들이 펼치는 방식대로 세대간 정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이 이해한 대로라면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같은 세대다. 즉 세대는 나이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굳이 우호적으로 설명하자면 세대간 정의를 “동시간대 세대간 정의(intratempral, intergenerational justice)”와 “시간차 세대간정의(intertemporal intergenerational justice)”로 나눌수도 있겠다.

이 구분 내에서 동시간대 세대간정의는 복잡하지 않은 분배문제다. 일하는 세대가 만들 수 있는 자원을 각 연령대별로 어떻게 나눌 것인가. – 이걸 복잡하게 만든 것은 없는 예산 끌어다 수당을 만든 그녀다-의 문제일 뿐. 노인에게 가야 할 예산은 일부 젊은이들에게 돌아가야할 몫이다. 이 문제는 분배의 문제고, 분배는 정치의 본질이다. 근로자들이 노인들에게 어떤 빚을 져서 갚는 게 아니라 동시대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돕는다는 말이다.

거창하게 끌어다 쓴 롤스의 논의는 미안한데 시간차 …, 바로 두번째 정의다. 그리고 여기에는 복잡한 이론이 있어 담기어렵다. 다만 오늘 이야기 하려 했던 것은, 지금 세대간 갈등은 어떤 윤리적인-당위적인 요소가 담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대간의 갈등이 아니라 증세를 통해 풀어갈 문제라는 것이고, 나이들었고 지금 일하고 있는 세대가 미래의 세대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다고 우길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