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법

법안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했다고 한다.
법안의 이름이 상당히 길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법안은 두 갈래의 목적을 두고 있다.
하나는 연명의료에 관한 것이고

연명의료에 대한 기본원칙, 연명의료결정의 관리 체계, 연명의료의 결정 및 그 이행 등에 필요한 사항을 정하여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을 제도화함으로써 환자의 자기결정을 존중하고 환자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며,

다른 하나는 호스피스-완화의료의 확대제공이다.

암환자에만 국한되어 있는 호스피스 서비스를 일정한 범위의 말기환자에게 확대 적용하도록 하고, 호스피스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근거 법령을 마련하여 국민 모두가 인간적인 품위를 지키며 편안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임.

 

해당 위원회를 통과한 것은 반갑지만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하는 일이 아직 남아있고, 하위법령을 개발하는 정말 복잡한 일이 남아 있다. 법안을 적극 지지했던 그룹과 내켜하지 않던 그룹이 정말 벼르고 있는 단계.

게다가 이 법이 통과되더라도 실행과정에 계속 문제가 생길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결국 우리나라의 사고는 사태를 범주로 나누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행위자의 합리성을 인정하고 그들이 고려할 가치와 준수할 절차를 지정하는 수준을 넘어서 이건되고, 저건 안되고… 시시콜콜히 지적하는 법률을 만들고 싶어했고, 이 법은 이도저도 아니게 그런 지시가 담긴 법이 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임종과정”을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로 함.

회생의 가능성, 회복되지 않음,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 사망이 임박. 언뜻 보기에는 별문제 없는 이 타협안은 실제 임상에서는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다. 치매, COPD, PVS, 뇌사… 결국 급속도로 악화되는 질병이 아닌 경우, 이 병들은 합병이 생긴 경우에만 이 법의 적용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에. 게다가 이 법이 적용되는 순간에도 중단할 수 있는 치료법이 한심할 정도로 제한되어 있어서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의학적 시술로서

결국 이법은 – 아무리 법이 호스피스의 확대를 선언하고 있다고 해도- 암에 국한된 법이 될 가능성이 너무 높다.

이 법이 시행되면 의료계는 여러가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서류작성부터 결정절차, 판단의 경험쌓기, 법적 함정을 피하거나/넘어지는 경험들… 그리고 시민들의 오해와 ‘종교계’의 항의와 정책적 무관심까지 거쳐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혼란은 의료계와 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수업료일까? 아니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너무 쉽게 타협한 다른 종류의 댓가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세대간 정의

세대간 정의라는 개념이 최근 회자되는 모양이다.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달라는 ‘노동개혁’ 주장과
투표소에서 1번밖에 모르는 노인들에게 애써 일한 것을 퍼줘야 되는 이유가 뭐냐는… 둘 다 노인과 젊은이들의 대결 양상이다.

이 대결에서는 노인들이 가져가는 것은 젊은이들이 빼앗긴 것이다. 이 논리를 정당화하려고 여기에 이상한 이론을 수입해다 덧붙인다. 존롤스가 이야기 했다는 intergenerational justice다. 정말 존 롤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미안한데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살펴보았던 롤스도, 세대간정의의 논쟁을 시작했던 파핏(Parfit)도, 분배문제의 대가 배리(Barry)도 우리의 논객들이 펼치는 방식대로 세대간 정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이 이해한 대로라면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같은 세대다. 즉 세대는 나이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굳이 우호적으로 설명하자면 세대간 정의를 “동시간대 세대간 정의(intratempral, intergenerational justice)”와 “시간차 세대간정의(intertemporal intergenerational justice)”로 나눌수도 있겠다.

이 구분 내에서 동시간대 세대간정의는 복잡하지 않은 분배문제다. 일하는 세대가 만들 수 있는 자원을 각 연령대별로 어떻게 나눌 것인가. – 이걸 복잡하게 만든 것은 없는 예산 끌어다 수당을 만든 그녀다-의 문제일 뿐. 노인에게 가야 할 예산은 일부 젊은이들에게 돌아가야할 몫이다. 이 문제는 분배의 문제고, 분배는 정치의 본질이다. 근로자들이 노인들에게 어떤 빚을 져서 갚는 게 아니라 동시대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돕는다는 말이다.

거창하게 끌어다 쓴 롤스의 논의는 미안한데 시간차 …, 바로 두번째 정의다. 그리고 여기에는 복잡한 이론이 있어 담기어렵다. 다만 오늘 이야기 하려 했던 것은, 지금 세대간 갈등은 어떤 윤리적인-당위적인 요소가 담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대간의 갈등이 아니라 증세를 통해 풀어갈 문제라는 것이고, 나이들었고 지금 일하고 있는 세대가 미래의 세대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다고 우길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http://plato.stanford.edu/entries/justice-intergenerational/#RawJusSavPri를 읽어보시라.

세대간 정의

세대간 정의라는 개념이 최근 회자되는 모양이다.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달라는 ‘노동개혁’ 주장과
투표소에서 1번밖에 모르는 노인들에게 애써 일한 것을 퍼줘야 되는 이유가 뭐냐는… 둘 다 노인과 젊은이들의 대결 양상이다.

이 대결에서는 노인들이 가져가는 것은 젊은이들이 빼앗긴 것이다. 이 논리를 정당화하려고 여기에 이상한 이론을 수입해다 덧붙인다. 존롤스가 이야기 했다는 intergenerational justice다. 정말 존 롤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미안한데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살펴보았던 롤스도, 세대간정의의 논쟁을 시작했던 파핏(Parfit)도, 분배문제의 대가 배리(Barry)도 우리의 논객들이 펼치는 방식대로 세대간 정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이 이해한 대로라면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같은 세대다. 즉 세대는 나이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굳이 우호적으로 설명하자면 세대간 정의를 “동시간대 세대간 정의(intratempral, intergenerational justice)”와 “시간차 세대간정의(intertemporal intergenerational justice)”로 나눌수도 있겠다.

이 구분 내에서 동시간대 세대간정의는 복잡하지 않은 분배문제다. 일하는 세대가 만들 수 있는 자원을 각 연령대별로 어떻게 나눌 것인가. – 이걸 복잡하게 만든 것은 없는 예산 끌어다 수당을 만든 그녀다-의 문제일 뿐. 노인에게 가야 할 예산은 일부 젊은이들에게 돌아가야할 몫이다. 이 문제는 분배의 문제고, 분배는 정치의 본질이다. 근로자들이 노인들에게 어떤 빚을 져서 갚는 게 아니라 동시대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돕는다는 말이다.

거창하게 끌어다 쓴 롤스의 논의는 미안한데 시간차 …, 바로 두번째 정의다. 그리고 여기에는 복잡한 이론이 있어 담기어렵다. 다만 오늘 이야기 하려 했던 것은, 지금 세대간 갈등은 어떤 윤리적인-당위적인 요소가 담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대간의 갈등이 아니라 증세를 통해 풀어갈 문제라는 것이고, 나이들었고 지금 일하고 있는 세대가 미래의 세대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다고 우길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보이는 것과 보여야 하는 것

어제 날짜 청년의사에 실린 김철중 기자의 칼럼에는 박원순 시장의 아들 MRI 조작에 대한 견해가 실렸다. 어떤 의사들은 그런 MRI가 나타날 확률이 ‘의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그 사람들 중에 영상의학 전문의도 있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 주장은 ‘과학적’, ‘논문’, ‘첨단 기계를 사용한 분석’ 등을 덧입는다. 이들은 스물두살 남자의 몸에서 보여야 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여야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20대의 골수신호 그리고 별로 비만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피하지방 두께. 이렇게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으므로 조작, 또는 위조.

이런 태도에서 의학적 사고를 들여다 보는 기회가 생긴다. 의사들은 과학적 지식을 사용해서 진단하고 치료한다. 과학적 지식은 개별 사례를 일반적 현상과 연결짓고, 개별 사례에 생길 일을 미리 알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진단 – 환자의 문제를 일반적 현상과 연결짓는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증상은 모두 다르지만 아주 엄밀하지 않은 인간의 사고를 통해 한가지 병으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결핵은, 요즘에야 결핵 균에 의한 감염증이라고 규정하지만, 감염 위치에 따라 증상이 너무 달라서 여러 가지 병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결핵균이다. 그런데 임상의사들은 결핵균을 발견해서 결핵이라고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결핵이라고 생각하는 임상증상을 확인하기 위해 결핵균을 찾게 된다. 결핵 증상이 있는 환자에게서 결핵균이 발견되지 않으면 검체를 잘못 채취했거나,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진단은 관찰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자신이 내린 직관을 확인하는 과정도 필요하게 된다.

임상 교육은 관찰을 질병과 연관 짓고, 이를 확인하는 절차를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이 부족한 의사들은 자신이 관찰한 몇 가지에 사로 잡힌 나머지 뻔히 보이는 더 중요한 사실들을 놓치곤 한다. 때로 더 중요한 이런 사실의 가치를 무시하기도 한다. 이런 조직적 편견을 극복하는 훈련이 임상 교육이다.

박주신 사건은 의사들의 조직적 편견의 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당연히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으니 조작이라는 말은 눈 앞에 보이는 것이 22살짜리 청년의 허리 사진을 설명에 포함시키기 보다 자기가 내린 결론을 앞세우는 태도에 불과하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설명이 너무 많이 붙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IRB 심의는 윤리를 보장하는가?

안그래도 올해초중국에서 시행되었다는 사람 유전자 조작으로 윤리학자들이 시끄럽게 했다. 인간 유전자를 조작하는 행위에 대한 윤리 논쟁이 시작된 셈이다. 스티븐 핑커가 생명윤리를 비난한 것은(굳이 비난이라는 어휘를 썼다!) 이런 윤리학자들의 문제제기에 대한 과학주의자의 답변이리라.
그런데 오늘자 가디언에는 영국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연구 승인이 제출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가디언이 소개한 연구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영국의 첨단 의학연구 관련 규제를 대표하는 HFEA가 인간 발생학 연구의 허용 범위와 관련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번 연구가 수정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일종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전선을 가능한 좁혀서 윤리적 논쟁을 빨리 끝내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 국가 차원의 윤리심의라고 해도, 그 윤리심의가 윤리성을 보장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문제는 복잡하다. 어떤 조건을 충족 시켜야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위원회의 심의- 신의 재가 – 종교 지도자의 인정 – 다수의 찬성?

위원회 같은 절차나 다수결을 받아들이지 않는, 종교적인 윤리관을 가진 이들에게 윤리는 그들만이 알아 낼 수 있는 비밀이기 때문에, 이번 연구에 대한 HFEA의 결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물론 IRB와 같은 제도는 실수하게 마련이다.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나은 의사결정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인간 유전자에 손을 대는 불경한 연구를 위원회가 승인하는 것이 가당한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예”

전문가 단체 – 이해단체

감사한 추천을 받아 몇몇 단체에서 활동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인정은 동기부여도 된다. 그래서 생긴 해프닝 하나.

지난 주말 보건복지부가 김세연 국회의원의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권리에 관한 법안”에 관해 기독교생명윤리협회에 요청한 의견서를 살펴보다 이런 관행이 못마땅해졌다. 이런 감정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가 아닐까? 다행인지 협회는 그 못마땅함의 근거가 무엇인지 내게 물었고, 정리해 보니 대강 이렇다.

*** 간사님, 협회 임원 여러분,

제 걱정을 진지하게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메일의 걱정은 사실 의견서의 내용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 단체의 관점을 반영하는데 있어서 여러 임원들의 견해를 묻고 상의하는 절차가 너무 간략하게 처리되지 않는거 하는 우려를 표한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충분한 의사소통의 시간이 있었는가? 가능한 문제를 충분히 검토하였는가? 우리 단체가 합의한 바 있는가, 혹은 의견의 일치를 이루고 있는가?
기본적으로 입법 과정에서 의견을 물을 때, 단체의 찬성/반대를 묻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단체에서 논의한 바, …… 의견이 있었다” 정도로 완곡하게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렇게 표현해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충분히 긍정적/부정적 뉘앙스를 파악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이 참에 제 견해를 말씀드리는 것이 문제제기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협회에 의견을 묻는 관행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단체/기관에 속해 있는 모든 성원이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가정 자체의 문제입니다.
입법 과정에서 이해단체의 견해를 묻는 경우가 있는데, 이해단체는 비교적 입장이 분명할 터이나 우리 협회가 이해단체로 분류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번 의견서는 전문가 단체의 견해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의견의 일치를 구하기 위해 엄격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협회의 의견서가 어떤 법적/윤리적으로 심각한 책임을 부과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전문가 단체의 의견을 며칠 사이에 정리하라는 태도가 정당할까요? 임상의사, 법률가, 목회자, 철학자 모두가 자신의 관점에서 연명의료의 문제에 접근하고 그 과정에서 사뭇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의견을 한번에 정리하라는 그 질문 자체가 합리적인가요. 아마 우리 협회가 보낼 답변은 “협회는 다양한 관점의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런 구성 상의 특징으로 인해 협회의 단일한 의견을 제출하기 어려우며, 본 의견서는 협회의 공식 입장이 아닌 임원들의 논의 결과임” 정도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런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의견서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그 수준이 유지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미 우리 의견서는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일학 드림

PS. 차제에 협회가 자주 듣는 질문들에 기본적 입장을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오랜 시간이 걸리고 감정적/육체적인 노력도 요구될 것입니다만 신속한 의사소통과 업무진행을 위해서는 이런 작업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작업에 관한 연구비를 신청할 수도 있겠구요.

양심의 문제: 양심적 거부와 권한의 남용 사이에서

 

켄터키의 시골, 어느 공무원이 종교적인 이유로 동성 커플에게 결혼증명서를 발급하지 않다가 감옥에 갔다. 논쟁이 되어 버렸고, 판사는 더이상 논쟁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는지 앞으로는 발급하라는 명령을 덧붙여 석방했다.

킴 데이비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는 권한을 남용한 것이고 –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한 셈이며, 당연한 법적 권리를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벌을 받은 것이다. 물론 양심에 따른 행동이니 다시 반복될 것이고.
문제는 이렇게 양심적 거부(단어 사용에 얼마나 많은 가치가 들어가 있는가! 양심이라는 말은 정당하다는 함의를 갖는다. 정당한지 나는 잘 모르겠다)를 할만한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할 때, 아니면 거부자가 유일하게 권한을 가진 사람일 때 발생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내 자유는(킴 데이비스의 경우는 의무라고 느낄 것이다) 타인의 정당한 권리 앞에서 멈춰야 한다. 자신을 civil servant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찬성했든 반대했든 공적으로 정해진 규정에 순복해야 하고, 더더욱 타인을 지켜야 한다. 이 점에서 그녀는 잘못했다. 이것은 (재량이 있었다면 ) 권한 남용이고 권한이 없었다면 불법이다.

권한 내에서 타협하는 것이 우선이고, 해결책 (공화당을 지지하든 의회 앞에 가서 피켓 시위를 하든)을 동시에 찾아야 하겠다. 그것이 어렵다면, 그리고 문제가 심각하고 피해갈 수 없을 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양심적 거부일 것이다. (양심적 거부보다 조용한 방식은 사직인데, 이렇게 되면 이슈가 되기 어렵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 그래서 다른 이들의 양심에도 공명을 일으켜야 하는 상황, 이를 위해 희생도 감수할 각오가 있을 때 양심적 거부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킴 데이비스의 처지가 그랬는지. 이런 희생을 간디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경우에 비교할 수 있을까?)

생명윤리 영역에서 양심적 거부는 낙태나 안락사 등 논쟁적인 의료행위를 주로 종교적인 이유로 시행하지 않는 의료인들의 행태를 지적할 때 사용된다. 그리고 권고안들은 다른 의료인을 찾아주도록 하고 있어서 대개 (다른 의료인을 찾을 수 있으니)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해소된다.
하지만 의료가 공적인 활동이 될 때, 예를 들어 예방접종같은 공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공공기관에 고용된 의사의 행위라면, 그는 법을 지켜야 한다. 이런 공적인 영역은 점차 확대될지 줄어들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건강의 관점, 자유의 관점

지난 8월 암네스티는 성매매를 더 이상 범죄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결의를 냈다. 이 결의는 성노동자만이 차별적으로 처벌받는 현재 법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했는데, 그 결의는 너무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형태를 띄게 됐다. 성매매의 합법화.

이 해프닝을 보면서 도덕과 현실의 갈등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가까운 시점을 기준으로 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암네스티의 선택이다.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드는 일. 그러나 도덕적 관점에서는 악몽이다. 성을 매매함으로써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일.

생명윤리도 비슷한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의학, 공중보건이라는 실천적 행위는 일정 시점을 기준으로 효율과 효과를 생각한다. 윤리는 어떤가? 윤리는 시점이 없다. 영원이라는 관점(sub specie aeternitatis) 에서 옳고 그른 것이 있다. 생명윤리의 관점은 어떤가? 영원인가, 아니면 일정한 시점이 있는가?

PS. 암네스티의 결정에 대한 내 생각은 어떤가. 나는 영원의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사람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책임이 무겁다. 그런 각오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솔직함에 대해서

Annals of Internal Medicine 8월 15일 자에는 clinical reflection 시간에 있었던 대화를 다룬 에세이가 실렸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한 학생이 의사들만 알고 있는 치부가 드러냈다.

(마취되어 의식을 잃은 환자를 성적으로 모욕하던 지도 전공의가) “내게 윙크하며 웃었어요” … “너도 웃었니?” … “예, 웃었어요. 어떻게 했어야 했지요?”

모두가 당혹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선생은 학생이나 전공의를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 해 준다. 그래서 에세이의 제목은 “우리 가족의 비밀(Our Family Secrets)”이다.

 

학생들이 실습하는 병원은 의사들의 성취와 영웅심이 과장되어 드러나는 공간이고, 학생들은 심각한 긴장감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 젊은이의 치기, 인종적/성적 차별의식 이런 것들을 품은 채 들어간다. 이 상황에서 상급자를 쳐다보고 흉내내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같을 수 있다. 그리고 당혹스러운 순간에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모를 경험부족이 학생들을 괴롭힌다. 성찰시간을 포함해서 학생들은 선생에게서 이 곤경을 헤쳐나갈 무엇을 얻으리라 기대하지만 그들도 실은 어찌할바를 모르는 상황.

선생은 학생들에게 왜 그랬을지 설명(하고 정당화) 해 줄수도 있다. 아니면 행위의 비윤리성을 지적하고, 국가위원회니 발표한 성희롱 예방법을 가르칠 수도 있다.
윤리선생은 그렇게 해서 학생들과 자신을 분리하고 도덕선생으로 전락한다. ‘답은 알아요. 그 답을 어떻게 실천할지 모르는 거에요’라는 학생의 말에 화살맞은 사람마냥 강의실에서 도망치고.

학생들과 이 순간에 공감해 주는 것은 어떨까? 그들의 괴로움을 후회를 나도 겪었다고, 나도 혹시 당신들에게 그런 어려움을 주고 있지 않은지 물어볼 수 있을까?
그래서 뭐가 달라질 거냐고? 당장 무엇을 바꾸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도덕적 십자군이 되라고 학생들을 떠밀어야 하나? (홍위병과 십자군이 무엇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나?)
그렇게 바꿀 수 없으면 윤리학자는 왜 학교에 두었는지 물을수도 있겠다. 그건 나도 궁금하다. 왜 윤리학자를 두었지? 같이 고민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안될까? 그렇게 그 순간을 견디고 자신은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과정에 증인 되는 것이 선생인 윤리학자의 역할이 아닐까?

실습학생의 의료윤리

실습 학생을 거미에 비유하는 농담이 있었다. 어디든 다니긴 하는데 하는 일은 없이 벽에 붙어서 관찰만 한다고.
하지만 학생들에게도 병원은 삶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학생들은 지식만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관찰을 통해 환자 돌보는 태도를 익히고 동료들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며 조금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인격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공감하고 돌보는 법을 익힌다.

문제는 아무도 그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병원에 던져진 학생들은, 간혹 관심을 가진 선생에게 배우는 시간을 제외하면, 혼자 돌아다니며 배워야 한다. 종종 혼자 떨어진 학생들은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고, 그 실수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실수가 되돌이킬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죽어가는 환자와 ‘셀카질’ 멕시코 여자 의대생 퇴학 위기(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50814100704509“

학생들이 환자를 돌보는 책임을 안이하게 여기지 않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다. 개인의 실수가 아닌 교육 체계의 문제일 수밖에 없고. 어떻게 주의시킬 것인가 – 동시에 성인으로 존중할 것인가 – 무엇을 인지시키고 실천에 옮길 것인지 계속 고민이다. 아직 우리 대학에서는 보고서의 표절을 금지하는 교육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의과대학 문화를 생각하면 엄청난 과제인데다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