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여야 하는 것

어제 날짜 청년의사에 실린 김철중 기자의 칼럼에는 박원순 시장의 아들 MRI 조작에 대한 견해가 실렸다. 어떤 의사들은 그런 MRI가 나타날 확률이 ‘의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그 사람들 중에 영상의학 전문의도 있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 주장은 ‘과학적’, ‘논문’, ‘첨단 기계를 사용한 분석’ 등을 덧입는다. 이들은 스물두살 남자의 몸에서 보여야 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여야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20대의 골수신호 그리고 별로 비만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피하지방 두께. 이렇게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으므로 조작, 또는 위조.

이런 태도에서 의학적 사고를 들여다 보는 기회가 생긴다. 의사들은 과학적 지식을 사용해서 진단하고 치료한다. 과학적 지식은 개별 사례를 일반적 현상과 연결짓고, 개별 사례에 생길 일을 미리 알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진단 – 환자의 문제를 일반적 현상과 연결짓는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증상은 모두 다르지만 아주 엄밀하지 않은 인간의 사고를 통해 한가지 병으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결핵은, 요즘에야 결핵 균에 의한 감염증이라고 규정하지만, 감염 위치에 따라 증상이 너무 달라서 여러 가지 병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결핵균이다. 그런데 임상의사들은 결핵균을 발견해서 결핵이라고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결핵이라고 생각하는 임상증상을 확인하기 위해 결핵균을 찾게 된다. 결핵 증상이 있는 환자에게서 결핵균이 발견되지 않으면 검체를 잘못 채취했거나,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진단은 관찰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자신이 내린 직관을 확인하는 과정도 필요하게 된다.

임상 교육은 관찰을 질병과 연관 짓고, 이를 확인하는 절차를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이 부족한 의사들은 자신이 관찰한 몇 가지에 사로 잡힌 나머지 뻔히 보이는 더 중요한 사실들을 놓치곤 한다. 때로 더 중요한 이런 사실의 가치를 무시하기도 한다. 이런 조직적 편견을 극복하는 훈련이 임상 교육이다.

박주신 사건은 의사들의 조직적 편견의 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당연히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으니 조작이라는 말은 눈 앞에 보이는 것이 22살짜리 청년의 허리 사진을 설명에 포함시키기 보다 자기가 내린 결론을 앞세우는 태도에 불과하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설명이 너무 많이 붙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IRB 심의는 윤리를 보장하는가?

안그래도 올해초중국에서 시행되었다는 사람 유전자 조작으로 윤리학자들이 시끄럽게 했다. 인간 유전자를 조작하는 행위에 대한 윤리 논쟁이 시작된 셈이다. 스티븐 핑커가 생명윤리를 비난한 것은(굳이 비난이라는 어휘를 썼다!) 이런 윤리학자들의 문제제기에 대한 과학주의자의 답변이리라.
그런데 오늘자 가디언에는 영국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연구 승인이 제출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가디언이 소개한 연구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영국의 첨단 의학연구 관련 규제를 대표하는 HFEA가 인간 발생학 연구의 허용 범위와 관련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번 연구가 수정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일종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전선을 가능한 좁혀서 윤리적 논쟁을 빨리 끝내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 국가 차원의 윤리심의라고 해도, 그 윤리심의가 윤리성을 보장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문제는 복잡하다. 어떤 조건을 충족 시켜야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위원회의 심의- 신의 재가 – 종교 지도자의 인정 – 다수의 찬성?

위원회 같은 절차나 다수결을 받아들이지 않는, 종교적인 윤리관을 가진 이들에게 윤리는 그들만이 알아 낼 수 있는 비밀이기 때문에, 이번 연구에 대한 HFEA의 결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물론 IRB와 같은 제도는 실수하게 마련이다.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나은 의사결정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인간 유전자에 손을 대는 불경한 연구를 위원회가 승인하는 것이 가당한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예”

전문가 단체 – 이해단체

감사한 추천을 받아 몇몇 단체에서 활동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인정은 동기부여도 된다. 그래서 생긴 해프닝 하나.

지난 주말 보건복지부가 김세연 국회의원의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권리에 관한 법안”에 관해 기독교생명윤리협회에 요청한 의견서를 살펴보다 이런 관행이 못마땅해졌다. 이런 감정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가 아닐까? 다행인지 협회는 그 못마땅함의 근거가 무엇인지 내게 물었고, 정리해 보니 대강 이렇다.

*** 간사님, 협회 임원 여러분,

제 걱정을 진지하게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메일의 걱정은 사실 의견서의 내용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 단체의 관점을 반영하는데 있어서 여러 임원들의 견해를 묻고 상의하는 절차가 너무 간략하게 처리되지 않는거 하는 우려를 표한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충분한 의사소통의 시간이 있었는가? 가능한 문제를 충분히 검토하였는가? 우리 단체가 합의한 바 있는가, 혹은 의견의 일치를 이루고 있는가?
기본적으로 입법 과정에서 의견을 물을 때, 단체의 찬성/반대를 묻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단체에서 논의한 바, …… 의견이 있었다” 정도로 완곡하게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렇게 표현해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충분히 긍정적/부정적 뉘앙스를 파악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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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참에 제 견해를 말씀드리는 것이 문제제기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협회에 의견을 묻는 관행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단체/기관에 속해 있는 모든 성원이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가정 자체의 문제입니다.
입법 과정에서 이해단체의 견해를 묻는 경우가 있는데, 이해단체는 비교적 입장이 분명할 터이나 우리 협회가 이해단체로 분류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번 의견서는 전문가 단체의 견해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의견의 일치를 구하기 위해 엄격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협회의 의견서가 어떤 법적/윤리적으로 심각한 책임을 부과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전문가 단체의 의견을 며칠 사이에 정리하라는 태도가 정당할까요? 임상의사, 법률가, 목회자, 철학자 모두가 자신의 관점에서 연명의료의 문제에 접근하고 그 과정에서 사뭇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의견을 한번에 정리하라는 그 질문 자체가 합리적인가요. 아마 우리 협회가 보낼 답변은 “협회는 다양한 관점의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런 구성 상의 특징으로 인해 협회의 단일한 의견을 제출하기 어려우며, 본 의견서는 협회의 공식 입장이 아닌 임원들의 논의 결과임” 정도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런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의견서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그 수준이 유지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미 우리 의견서는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일학 드림

PS. 차제에 협회가 자주 듣는 질문들에 기본적 입장을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오랜 시간이 걸리고 감정적/육체적인 노력도 요구될 것입니다만 신속한 의사소통과 업무진행을 위해서는 이런 작업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작업에 관한 연구비를 신청할 수도 있겠구요.

양심의 문제: 양심적 거부와 권한의 남용 사이에서

 

켄터키의 시골, 어느 공무원이 종교적인 이유로 동성 커플에게 결혼증명서를 발급하지 않다가 감옥에 갔다. 논쟁이 되어 버렸고, 판사는 더이상 논쟁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는지 앞으로는 발급하라는 명령을 덧붙여 석방했다.

킴 데이비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는 권한을 남용한 것이고 –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한 셈이며, 당연한 법적 권리를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벌을 받은 것이다. 물론 양심에 따른 행동이니 다시 반복될 것이고.
문제는 이렇게 양심적 거부(단어 사용에 얼마나 많은 가치가 들어가 있는가! 양심이라는 말은 정당하다는 함의를 갖는다. 정당한지 나는 잘 모르겠다)를 할만한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할 때, 아니면 거부자가 유일하게 권한을 가진 사람일 때 발생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내 자유는(킴 데이비스의 경우는 의무라고 느낄 것이다) 타인의 정당한 권리 앞에서 멈춰야 한다. 자신을 civil servant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찬성했든 반대했든 공적으로 정해진 규정에 순복해야 하고, 더더욱 타인을 지켜야 한다. 이 점에서 그녀는 잘못했다. 이것은 (재량이 있었다면 ) 권한 남용이고 권한이 없었다면 불법이다.

권한 내에서 타협하는 것이 우선이고, 해결책 (공화당을 지지하든 의회 앞에 가서 피켓 시위를 하든)을 동시에 찾아야 하겠다. 그것이 어렵다면, 그리고 문제가 심각하고 피해갈 수 없을 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양심적 거부일 것이다. (양심적 거부보다 조용한 방식은 사직인데, 이렇게 되면 이슈가 되기 어렵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 그래서 다른 이들의 양심에도 공명을 일으켜야 하는 상황, 이를 위해 희생도 감수할 각오가 있을 때 양심적 거부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킴 데이비스의 처지가 그랬는지. 이런 희생을 간디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경우에 비교할 수 있을까?)

생명윤리 영역에서 양심적 거부는 낙태나 안락사 등 논쟁적인 의료행위를 주로 종교적인 이유로 시행하지 않는 의료인들의 행태를 지적할 때 사용된다. 그리고 권고안들은 다른 의료인을 찾아주도록 하고 있어서 대개 (다른 의료인을 찾을 수 있으니)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해소된다.
하지만 의료가 공적인 활동이 될 때, 예를 들어 예방접종같은 공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공공기관에 고용된 의사의 행위라면, 그는 법을 지켜야 한다. 이런 공적인 영역은 점차 확대될지 줄어들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건강의 관점, 자유의 관점

지난 8월 암네스티는 성매매를 더 이상 범죄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결의를 냈다. 이 결의는 성노동자만이 차별적으로 처벌받는 현재 법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했는데, 그 결의는 너무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형태를 띄게 됐다. 성매매의 합법화.

이 해프닝을 보면서 도덕과 현실의 갈등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가까운 시점을 기준으로 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암네스티의 선택이다.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드는 일. 그러나 도덕적 관점에서는 악몽이다. 성을 매매함으로써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일.

생명윤리도 비슷한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의학, 공중보건이라는 실천적 행위는 일정 시점을 기준으로 효율과 효과를 생각한다. 윤리는 어떤가? 윤리는 시점이 없다. 영원이라는 관점(sub specie aeternitatis) 에서 옳고 그른 것이 있다. 생명윤리의 관점은 어떤가? 영원인가, 아니면 일정한 시점이 있는가?

PS. 암네스티의 결정에 대한 내 생각은 어떤가. 나는 영원의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사람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책임이 무겁다. 그런 각오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솔직함에 대해서

Annals of Internal Medicine 8월 15일 자에는 clinical reflection 시간에 있었던 대화를 다룬 에세이가 실렸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한 학생이 의사들만 알고 있는 치부가 드러냈다.

(마취되어 의식을 잃은 환자를 성적으로 모욕하던 지도 전공의가) “내게 윙크하며 웃었어요” … “너도 웃었니?” … “예, 웃었어요. 어떻게 했어야 했지요?”

모두가 당혹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선생은 학생이나 전공의를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 해 준다. 그래서 에세이의 제목은 “우리 가족의 비밀(Our Family Secrets)”이다.

 

학생들이 실습하는 병원은 의사들의 성취와 영웅심이 과장되어 드러나는 공간이고, 학생들은 심각한 긴장감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 젊은이의 치기, 인종적/성적 차별의식 이런 것들을 품은 채 들어간다. 이 상황에서 상급자를 쳐다보고 흉내내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같을 수 있다. 그리고 당혹스러운 순간에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모를 경험부족이 학생들을 괴롭힌다. 성찰시간을 포함해서 학생들은 선생에게서 이 곤경을 헤쳐나갈 무엇을 얻으리라 기대하지만 그들도 실은 어찌할바를 모르는 상황.

선생은 학생들에게 왜 그랬을지 설명(하고 정당화) 해 줄수도 있다. 아니면 행위의 비윤리성을 지적하고, 국가위원회니 발표한 성희롱 예방법을 가르칠 수도 있다.
윤리선생은 그렇게 해서 학생들과 자신을 분리하고 도덕선생으로 전락한다. ‘답은 알아요. 그 답을 어떻게 실천할지 모르는 거에요’라는 학생의 말에 화살맞은 사람마냥 강의실에서 도망치고.

학생들과 이 순간에 공감해 주는 것은 어떨까? 그들의 괴로움을 후회를 나도 겪었다고, 나도 혹시 당신들에게 그런 어려움을 주고 있지 않은지 물어볼 수 있을까?
그래서 뭐가 달라질 거냐고? 당장 무엇을 바꾸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도덕적 십자군이 되라고 학생들을 떠밀어야 하나? (홍위병과 십자군이 무엇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나?)
그렇게 바꿀 수 없으면 윤리학자는 왜 학교에 두었는지 물을수도 있겠다. 그건 나도 궁금하다. 왜 윤리학자를 두었지? 같이 고민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안될까? 그렇게 그 순간을 견디고 자신은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과정에 증인 되는 것이 선생인 윤리학자의 역할이 아닐까?

실습학생의 의료윤리

실습 학생을 거미에 비유하는 농담이 있었다. 어디든 다니긴 하는데 하는 일은 없이 벽에 붙어서 관찰만 한다고.
하지만 학생들에게도 병원은 삶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학생들은 지식만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관찰을 통해 환자 돌보는 태도를 익히고 동료들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며 조금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인격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공감하고 돌보는 법을 익힌다.

문제는 아무도 그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병원에 던져진 학생들은, 간혹 관심을 가진 선생에게 배우는 시간을 제외하면, 혼자 돌아다니며 배워야 한다. 종종 혼자 떨어진 학생들은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고, 그 실수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실수가 되돌이킬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죽어가는 환자와 ‘셀카질’ 멕시코 여자 의대생 퇴학 위기(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50814100704509

학생들이 환자를 돌보는 책임을 안이하게 여기지 않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다. 개인의 실수가 아닌 교육 체계의 문제일 수밖에 없고. 어떻게 주의시킬 것인가 – 동시에 성인으로 존중할 것인가 – 무엇을 인지시키고 실천에 옮길 것인지 계속 고민이다. 아직 우리 대학에서는 보고서의 표절을 금지하는 교육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의과대학 문화를 생각하면 엄청난 과제인데다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만).

메르스는 인재(人災)인가, 천재(天災)인가?

<서울시에서 간행하는 서울사랑(love.seoul.go.kr)에 실린 원고입니다. 초고이니 아마 편집이 좀 되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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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혹은 전염병)에 걸리면 세계의 적대감을 말그대로 몸소 경험하게 된다. 병에 걸리면 우리 몸이 정말 아프다. 아픈 우리는 죽음을 직감하고 두려워하게 되며, 죽음을 피할 방법을 찾게 된다. 병에 걸린 사람은 사회적으로도 아프다. 감염병이, 메르스가 특히 그랬는데, 어느 사람을, 어떤 경로로 찾아갈지 알아낼 방법이 없기에 병에 걸린 사람은 위험하다. 그래서 병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스스로 거리를 두기도 하고 강제로 격리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은 생각보다 심각하게 아프다. 일상적인 대화와 몸짓이 보통의 생명을 위해 얼마나 필요한지 격리된 사람보다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없는 사회에 생기는 빈 자리는 그 사람의 자리보다 더 크다. 생각해 보자. 만약 이렇게 아픈 사람이 국민의 5%, 10%가 된다면 한 사회가 기능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감염병 대책은 모든 국가의 중대한 책무였고 근대 국가가 수립한 공중보건체계는 위대한 성취였다. 공중보건은 국가가 감염병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역량을 동원하여 감염병을 예방하고 발생한 감염병의 해결을 위해 취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근대국가의 폭력성이나 공중보건조치에 내재한 강제성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감염병이 발생하였는지 감시하고, 병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확산되는지 조사하며(역학조사), 환자를 치료하고, 확산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격리와 소독과 같은 수단을 활용(방역대책)하는 동시에 사회와 소통하고 불필요한 영향을 최소화하는 조치가 공중보건이 하는 활동이다. 이런 활동이 가능하도록 인력과 재정을 확보하고, 그리고 권한의 범위와 한계를 설정해 두는 일도 이 공중보건의 활동에 포함된다.

먼저 작년에 서아프리카를 강타했던 에볼라감염병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에볼라감염병 보도에서 먼저 기억나는 것은 우주복 같은 방호복이고, 그때 우리는 ‘이렇게 무섭구나’, ‘의학기술이 이렇게 정교하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조금 후 에볼라 치료제를 시험한다는 기사와 에볼라 감염병에 대처하기 위해 애쓰다 자신이 감염된 의료인과 그들을 둘러싼 휴먼스토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먼 곳의 이야기여서 이런 기억만 있는 것이다. 에볼라감염병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경험과 이들과 함께 분투했던 공중보건활동가들의 밋밋한 이야기는 우리가 들을 수 없었다. 이들은 치료제도 없이 가장 고전적인 방법(물론 고도로 정교화 된, 그렇지만 역시 고전적인 역학조사와 격리)만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고 설득하며 싸웠다. 에볼라는 아직도 감염자가 생긴다고 하지만, 이제 그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우리는 사스와 신종플루와 같은 병, 에볼라와 비슷한 이야기를 기억한다.

이제 메르스로 돌아가보자. 메르스 대책보다 메르스 감염병으로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메르스 병으로 인한 신체적 아픔, 죽음의 공포와 실제 닥친 죽음, 그리고 뒤따른 사회적 격리를 충분히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접촉자로 격리된 사람도 포함되어야 한다.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공감이 시작이 되어야 한다. 위기앞에서의 공감과 연대의식이 한 사회가 건강하다는 증거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공감할 줄 몰랐다. 신상을 캤고, 넘겨짚어 아이들을 학교에 오지 못하게 했고 희생자를 가해자로 오해했다. 한가지만 더, 의료진을 영웅으로 만들지 말고 존중하는 일이 필요하다. 의료진과 방역당국에 대한 신뢰가 희생이나 대단한 지적 능력, 치료법의 개발 같은 기대가 되지 않아야 한다. 의료진이 정치가 아니라 방역과 공공의 보건만을 판단의 가치로 삼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공간을 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메르스는 천재다. 쉽게 잊고 지내지만 이 세계는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비는 필요한 때 내리지 않고, 혹한과 혹서, 또는 황사 때문에 숨쉬는 일도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다. 병충해는 벼와 과실을 위협하고 숲의 나무를 고사시킨다. 인간은 그래서 조상의 음덕과 전능자의 보살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은 문명의 발전으로 훨씬 안전하게 지내게 된 것처럼, 자기를 직접 책임지고 보호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일은 사회를 보호하는 제도와 수단이 발전한 정도다. 우리 사회의 안전을 보장하는 제도는 정교화되었고 우리 일상에 깊이 파고 들어 깊이 들여다 보지 않으면, 파악되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를 둘러싼 적대적인 세계를 잊어도 될만큼 안전해졌다는 말인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회가 보장하는 안전은 기술과 지식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고 이 구조물이 서있는 기반과 유지하는 뼈대는 불완전한 기술, 지식,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지난 한달여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흔든 메르스 사태가 드러냈다.

재난은 한 사회의 취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제도가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재난은 인재라고 하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메르스는 우리 사회의 취약함을 드러냈고, 국민 모두가 보호받지 못하고 있음도 알게 했다. 이제 메르스가 지나면 우리 사회를 복구하는 일이 남는다. 제도개선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것이다. 이 개선이 우리가 신뢰하는 전문가들에게 자율성의 공간을 부여하도록, 그리고 모든 시민들을 그 보호의 대상으로 삼도록, 그리고 사람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이루어지도록 주의깊게 감시해야 할 것이다.

수술과 절제한 암덩어리

의과대학 수업시간에 HeLa 세포라는 이름을 들은 적 있다. Henrietta라는 이름의 여성에게서 얻은 자궁경부암 세포를 키워내 만든 세포들에 붙인 이름이다. (하나의 세포를 분열시켜 만든 세포들을 세포주, strain이라고 부른다)
헨리에타는 1951년 사망했지만 그녀의 세포는 보통의 세포들과 달리 죽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의학연구에 여러모로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들 연구에는 소아마비 백신 개발도 포함되어 있다.)

산술적으로는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용되었던 이 세포주는 채취과정에서 이후 활용에 대한 동의를 환자 본인에게 받지 않았고(그 시기에야 수술과정에서 얻은 검체 사용에 동의를 얻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결과 인종적/성적 차별까지 포함하여 다양한 비난을 받고 있다.

1. 개인의 유전적 정보가 그 이름과 함께 모두 공개되었다는 것, 그것도 동의를 얻지 않은 상태에서.
2. 많은 연구자들이 이익을 얻고 있으며, HeLa 세포주를 개발한 이들도 이익을 얻었을 것이지만 환자 본인이나 그 가족이 그 이익을 나눠갖지 못했다는 점
3. 이런 잘못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사과나 보상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

2013년 8월 미국 보건원(NIH)과 헨리에타의 가족은 비밀을 보호하고, 이후에 HeLa 세포에서 얻은 추가적인 유전정보 사용시에는 사전에 검토를 하는 등의 해결방안에 합의했다.

이 사건은 기구한 한 여성의 이야기로 소개된 바 있다.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 연구자나 연구를 감독하는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문제가 아니었던 관행이 오래지 않아 추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곤란한 이야기가 된다.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 연구자나 연구기관은, 비틀거리긴 했지만, 용하게 이 문제들을 해결해 왔다는 것이다.

이름을 밝힐 것인가?

메르스 관리에 헛점이 많이 노출된 후, 게다가 현 정부 특유의 윽박지르기까지 거들고 나니 감염병 관리에 정부로부터 기대할 것이 없다는 인식이 퍼지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시민들이 기대를 접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 순간에 크나큰 재앙이 닥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인권, 알권리, 정부의 투명성 같은 (내가 평소에 강조해 왔던) 가치는 감염병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잠시 유보해야 할 것이다. 이런 권리들의 근거가 되는 건강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유는 부담스러우나 반쯤 전시상황인 셈이다. 그래서 지금 시민들이 정부에게 기대해야 할 것은 다른 무엇보다 효율적인 감염병 통제다. 그리고 기꺼이 협조해야 한다.
효과적이고 신속한 치료법이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의료시설 내에서 대증요법을 취해야 할, 신종감염병 대처에서 핵심은 병원체를 (솔직하게 말하면 감염병을 확산시킬 수 있는 환자나 잠복기 등… 사람을) 가두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권위를 잃는 것은 이 사람들을 시설에 (강제로) 모으고, 필요한 치료를 제공하는 일을 심각하게 어렵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다.
권위없는 정부에 현재 시민들은 특이한 요구를 하고 있다. 어느 병원에서 환자가 발생했고, (아마 조금 더 나가면 수와 진료경과까지 요구할까 걱정이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정보를 공개하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쉽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감염병 통제에 도움이 된다면 공개하고, 그렇지 않다면 공개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판단은 방역전문가들이 하라)

공개하든 공개하지 않든 정부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위협을 느낀 시민들이 도움을 받을 경로를 만들어 두라는 것이다. 공공의료기관이 할 일이다. 그리고 1차의료기관 등 의료인의 협력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공공의료기관이 위기에 대처할 용량(capacity)이 되는가? 일선의료인들이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 정부의 눈과 손이 되어 줄까? 의료인들의 신뢰는 어떻게 끌어내려 하나?

이미 이런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프로토콜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껏 잘 해오지 않았나? 이 프로토콜을 시민들과 소통하고 개선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없다면? 그땐 정말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