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서 발급비에 관해

진단서 발급비 상한이 책정됐다. 상한이다. 정액이 아니라.
복지부는 시장이 작동하게끔 상한선을 책정하고 그 외에는 자유를 준 모양이다.
한편에선 진단서가 비싸다는 이야기를 한다. 치료도 다 해놓고, 비용도 다 받았으니 옮겨 적기만 하면 되는 것을 지금까지 그리 비싸게 청구했느냐는 것이다.

의사들에게 몇 가지 법적 의무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진단서 발급의무다.
③의사·치과의사 또는 한의사는 자신이 진찰하거나 검안한 자에 대한 진단서

검안서 또는 증명서 교부를 요구받은 때에는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한다. (의료법 제17조 제4항)

진단서 발급은 몇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진료에 대한 확인문서 발급
2. 법률 체계에 봉사하는 사회적 도구로서
3. 환자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진단, 예후를 판단하는 의료행위의 일부로서

이 차원이 섞여서 터무니 없는 비용이 책정된 것 아니겠나. 이걸 적폐 해소라고 내놓은 제안자도 한심하고, 여기에 아무 소리 못하는 의협은 딱하다.

치료 다 받은 후 확인서를 받아가는 것이라면 비용을 낮추면 될 것이다. 그런데 진단서 작성이 내원 목적인 사람에게도 진단서 작성 비용을 받지 말라는 말은 터무니 없게 들리다.

사실 한 가지 제안이 있긴 하다.
모든 진료 기록은, 진단명과 검사명까지 포함해서 심평원에 일단 모인다. 거기서 발급받으라고 하라.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전산서비스로 무료처리 가능할 거다.

간호사, 의사는 정서적으로 충분히 강한가?

 

캘리포니아 어느 병원 중환자실의 사진이다(출처: bioethics.net 블로그)

과연, 이 아이를 하루 세번 만나야 하는 의료진은 감정적으로 충분히 강한가? 환자를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무를 강요당할 때,
또 의무에 따른 그 결과로 경험할 무력감, 죄책감, 슬픔은 누가 해결해 줄까?

모두가 약하고 모두가 도움을 바란다고, 잠시 물러서서 함께 우는 것이, 우리 약점을 인정하는 해결책이 머리로는 가능하겠지만…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우리 직업은 이미, 그리고 점점 더 극한 직업이 되어간다.

타당한 약품 가격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경우에도 약가는 적지 않은 부담을 차지한다 (건강보험 지출 중 약제비 비중은 25% 내외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고, 2015년 OECD 보고서에서는 우리나라 약제비 비중이 OECD 평균 정도 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연 약품 가격은 합리적으로 결정되는가? 약가는 독점적으로 결정된다. 신약의 경우는 특허로 결정권이 보장되기에 독점의 우려가 크다. 건강보험제도의 약가 심의를 통해 check and balance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지만 심의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아예 한국 시장을 회피함으로써 제도를 사보타주한다는 혐의도 있다.

물론 한국의 심의 당사자가 또다른 독점이니 불만도 이해할만하다. 그렇다고 한국 심의 체계가 혁신에 장애물일까? 한국의 의료체계, 치료는 약에 의존하고, 대학병원이 임상시험에 용이한 환경을 제공하는 이런 특징을 고려하면 overall 제약산업에는 유리한 환경이 아닌가?

우리 심의제도는 약가를 통제하지 않으면 건강보험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이해에서 도입된 것이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닌데, 약가에 대한 의심, 약가를 어떻게든 통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미국의 경우에는 각 주에서 약가 구성을 투명하게 밝히라는 입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관련 Bioethics.net 기사) 이런 입법이 한편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트럼프는 약가를 낮추겠다고 선언한 바 있고,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막상 위원의 면면을 보니 가격 인하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과 대조된다.

그러나 미국의 이 강력한 법률은 오바마 재직 당시의 Physician Sunshine Act와 비슷한 내용을 갖는 것 같다. 약가를 직접 통제하기 보다 약가의 구성요소, 상승분의 근거 등을 투명하게 밝히라는 것인데 드러난 근거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시민 사회가 대처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리 관료들이야 더 좋은 수단을 생각하겠지만 이렇게 에둘러 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설득할 수 없는 사람들…

지난 달 JME에 재미있는 논문이 하나 게재되었다. “Nudges in a post-truth world” 논문은 증거를 제시해도 꿈쩍하지 않는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제안하는 내용이다.

논문은 심리학자들이 ‘the backfire effect’라고 부르는 현상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이 현상은 어떤 증거를 거부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증거가 제시될수록 더 강하게 거부하는 성향을 묘사하는 것이다. 증거를 위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게다. 아니면 (또는 결과로) 원래 입장을 변호하기 필요한 것을 쉽게 기억하고, (잘 기억해서) 능숙하게 설명/사용할 수 있는 것이 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연히 나도 포함해서) 분명한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바로잡기 위해 , 이 논문에서는, 정보 전달 방법을 바꾸는 제안을 한다. 소위 넛지(nudge)라고 소개된 방법을 사용하면 어떻겠냐는 것인데 저자는 “Nudges to reason”이란 이름을 붙인다. 어떤 수단으로 증거를 분명히 드러내서 사람들이 반응하기(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자는 것이다. 윤리학적 관점에서 불편하게 보인다. 이게 타인을 자율적 주체로 대하는 것 맞나?

먼저 생각할 것은 넛지를 정보 조작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정보 제공방식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두번째는 이 정보를 통해 행위를 ‘조작’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율성을 ‘신장’시키는 것인가. 세번째는, 자율성이라는 입장에서는 고약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넛지를 통해 그 대상의 이익을 보장하는 (또는 피해를 예방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생명윤리의 어떤 문제는, 줄기세포, 하이브리드 동물, 연명치료… (논변을 포함한) 근거라는 것이 충분하지 않은 정보, 일방적인 정보, 또는 조작된 정보인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nudges to reason’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후기) 급히 “넛지”를 찾아 읽어 보았다. 한 구절이 강렬하다.

사람들은 완벽한 예측을 해야 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편향되지 않은 예측을 해야 한다.

이해상충

2009년에 의료윤리학회가 주도한 이해상충 연구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얼마전 미국 의사협회지에 이해상충이 다뤄진 것을 보니 추억이 살아난다.

참 열심히 공부했는데… 환자를 대상으로 만든 깔끔한 자료가 인상적이다.

http://jamanetwork.com/journals/jama/fullarticle/2623608

PS. 데츠카 오사무의 아톰에는 로봇 레슬러들의 에피소드가 있다. 그 에피소드를 리메이크한 “플루토”는 인간성을 재미있게 해석하는데, 인간성을 “편향”으로, 그 편향이 감정때문에 생긴다는 게다. 인간 본성이 치우칠 수밖에 없다면,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차꼬도 함께 받아들이면 어떨까?

아이의 죽음에 관하여 

사무엘하12장 아이의 죽음을 두고 다윗이 기도하고, 받아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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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께서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아 준 아이에게 중병을 내리셨다. 다윗은 식음을 전폐하고 베옷을 걸친 채 밤을 새우며 어린것을 살려 달라고 맨땅에 엎드려 하느님께 애원하였다. 늙은 신하들이 둘러서서 일어나라고 했으나, 그는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더불어 음식을 입에 대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기는 마침내 칠 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다윗에게 아기가 죽었다는 것을 차마 알리지 못하고 수군거렸다. “아기가 살아 있을 때에도 우리 말을 듣지 않으셨는데,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면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는 아이가 죽었음을 알아 채고 아기가 죽었느냐고 물었다. 신하들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다윗은 땅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목욕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 야훼의 전에 들어가 예배를 올렸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 와 음식을 차려 오게 하여 먹기 시작하였다. 신하들이 물었다. “아기가 살아 계실 때에는 잡수시지도 않고 아기 생각만 하며 우시더니, 막상 아기가 돌아 가시자 일어나셔서음식을 드시니 어찌 된 일이십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그 애가 살아 있을 때 굶으며 운 것은 행여 야훼께서 나를 불쌍히 보시고 아기를 살려 주실까 해서였소. 아기가 이미 죽고 없는데 굶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내가 굶는다고 죽은 아이가 돌아 오겠소? 내가 그 애한테 갈 수는 있지만, 그 애가 나한테 돌아 올 수는 없지 않소?” (공동번역 사무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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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설교 시간에 이 본문이 소개되었다. 설교 내용은 잊었지만 이 이야기는 잊지 못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세상을 떠나는 이 짧은 일주일 동안 아비는 느꼈을 공포를 생각한다. 하느님의 유죄 판결과 처벌을 듣고 먼저 닥쳤을 막연함.
아이가 죽을 것이라니? 이 선고 이후 출산을 기다리는 기쁨은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로 바뀌었다. 그렇게 기쁨이 죽음으로 바뀐 후, 다윗의 영혼도 시들어 갔으리라. 나와 닮은, 내 본질이 죽기 위해 태어난다니.
아담이 아내를 만난 후 고백했던 “내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라는 말은 흥미롭게도 자식에게도 적용된다. 남자는 자식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다윗이에게는 이 기쁨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아이에게서 발견하게 될 것은 자신의 죽음이다. 이전에 대언자가 했던 말은 허공에 흩어졌으니 내가 잊어버리면 허황하게 지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병든 아기를 보는 그 순간 죽음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절대 빗나가지 않는 심판! 아이는 그를 닮았고, 다른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아이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울며 매달렸던 것은, 세상을 스쳐지나는 어린 영혼의 장례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아이는 죽음을 슬퍼할 사람이 부모 말고는 없으니 내가 미리 슬퍼하며 장례를 치르자, 혹시 죽음을 슬퍼하는 조물주가 이 서글픈 장례를 보고, 나의 슬픔을 보고, 마음을 돌이키실까, 이런 말도 안되는 희망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아이가 죽을 병에 걸렸다. 아이에게 왜 그 불행이 닥쳤는지 성경의 설명은 부적절하지만 – 갓 태어난 아이의 병보다 불공평한 것이 있을까? 내겐 어린 아이의 죽음같이 분한 일이 없다.
그러나 구경꾼이나 화를 낸다. 아비는 분노할 힘이 없다. 아이와 함께 죽어 갔으니, 아이가 누리지 못한 시간을 애곡하고 있었으니, 아이를 돌려달라고 – 사실은 자기 생명을 돌려 달라고 간절히 빌고 있었으니.

이 이야기는 다윗의 성공담으로 이어진다. 솔로몬이 태어나고, (버림받지 않은) 사랑받은 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국가는 강성해졌다. 그러나 다윗이 죽은 아이를 잊었을까? 다윗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그 애한테 갈 수는 있지만, 그애가 나한테 돌아 올 수는 없지 않소?” 그의 남은 삶은, 이름도 없이 세상을 떠난 아이에게 돌아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널리즘과 휴머니즘: 무엇이 우선인가?

이 사진을 기억하는가?

기자정신으로 안전하지 않은 곳을 돌아다닌 존 카터에게 퓰리처 상을,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비난을 안긴 사진이다.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관련기사). 그에게 쏟아진 비난은 죽음을 앞둔 아이를 버려둔 채 달려가는 저널리즘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안전 문제 때문에 현지인과 접촉하지 말라는 활동가의 지시가 있었다고 자신을 변호했지만 그 변호는 완전하지 않았다.

JTBC 기자가 정유라의 은신처를 신고하고, 다시 그의 검거 현장을 촬영했다. 그리고 심각한 저널리즘의 위기라는 경보가 울린다(관련기사). 이번에 그가 받는 비난은 존 카터의 경우와 정반대이다. 어떻게 기자가 자신이 개입한 사건을 보도할 수 있는가? 이 비난은 기자는 객관적이어야 하고, 그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자연인으로서 갖는 의무를 버릴 수 있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사실 이런 중립성 때문에 기자들은 분쟁지역에서도 기사작성의 자유와 안전을 보호 받는다.
그러니 아마 기자는 곤경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jtbc의 보도를 거북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생겼는지도 모르니. 그는 보도의 원칙을 어긴 사람이다.

모든 ‘전문직’은 섬세한 윤리의식을 발전시키고, 전수한다. 이번 사건은 저널리즘의 문제다. 그런데 이 보도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라는 큰 그림의 일부였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다른 전문직의 일탈을 발견한다. 의사, 고위공무원, 투자가… 그들 나름대로 전문직의 에토스가 있었다. 환자의 비밀을 지킨다, 조직의 안위를 유지한다, 정보원을 보호한다. 어느 하나도 인정되지 않았다. jtbc의 그 기자가 저널리즘의 에토스를 유지했다면, 그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까?
나는 다른 사건도 기억한다. 삼성이 검사들에게 떡값을 제공해 왔던 사실을 고발했던 MBC 기자들, 변호사 김용철… 이들 역시 언론윤리와 법조인 윤리를 근거로 호되게 비난을 받았다. 결국 그들은 전문직 내에서는 배제당하는 길을 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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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에는 인도주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주권국 사이의 불간섭은 인도주의의 문제에까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해다. UN 평화유지군이 인도주의원칙에 의존해서 파병된다. 인권의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전쟁을 불사하는 태도 문제다. 이렇게 한 영역 안에서 유지되는 원칙이라도, 심지어 현실적인 이유로 유지되는 경우라도, 그 원칙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존 카터는 생명의 문제 앞에서 저널리즘을 포기했어야 했다. 대기업의 조직적 부정 앞에 법조인은 고객의 비밀을 지킬 의무에서 면제받는다. 최순실과 박근혜의 문제 앞에서 기자는 대체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나? 그의 행위는 더 앞선 가치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그의 처지를 동정한다. 저널리즘 원칙을 지켰어도, 정의감에 따른 행동을 했어도, 그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쪽을 잡았어도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딜레마다. 돌진하는 황소의 뿔은 어느 한쪽을 잡아도 찔릴 수밖에 없다. 기자가 처한 곤경과 그의 시대에 유감을 먼저 표하라. 그리고 그의 시대는 윤리의 한계이기도 했음을 인정하자.

호모포비아와 죽음의 정치

미셸 푸코의 “죽음의 권리와 삶에 대한 권력(여기 번역본 링크)”을 읽고 있다. 이 논문에서 특히 관심을 갖게 된 주장이 있다. (섬세한 주장을 뭉뚱그리면) 그는 현대 사회가 더 이상 주권국가의 존립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고 본다 (아직 대한민국은 그렇다). 주권이 아니라면 개인의 삶의 기반을 제약할 수 있는 긴급한 상황이 있는가? 바로 우리의 생존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이다.

이 글을 읽다가 이 논리가 자꾸 HIV/AIDS를 들먹이는 호모포빅의 논리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강 이렇다.

우리와 다른 그들 – 죽음의 질병을 퍼뜨리는 자들- 우리 ‘종족’의 생물학적 위기 – (수사학적 도구로서) (동화를 호소하는 제스처와) 배제 필요성 설득 – 제노사이드의 욕망 실현

최근의 개신교 서클내에서 돌아다니는 논리는 특히 HIV/AIDS 확산의 주범으로, 우리 사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악으로 설정하는데 집중하는 것 같다. 이 논리에는 헛점이 많기도 하지만 이미 사회가 작동하는 논리라는 점에서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정도까지만.

인종평화는 가능할까?

페이스북 링크를 통해 블로그 기사 하나를 읽게 되었다. 상당히 자극적인 제목 “백인 미국인은 한국인을 어떻게 볼까?” 그리고 기분이 나빴다. ‘그럴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 일지 몰랐다.’라는 심정일까?

연구실로 오가는 길에서, 이 기사 생각을 했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인간다운 감정’이 없다는 판단을 한다는 기사가 마음에 걸렸다. 내가 요즈음 외국에 거주하며, 감정을 쉽게 교류하지 못하고 있기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농담의 코드가 다를 때도 있고,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도 다르고…) 그런데 감정의 교류라는 말은 주고-받는 상대성을 내포한다. 내가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도 관련있을 것이다.
나 역시 외국인을, 백인 흑인 인도인 심지어 중국인까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적 있다. 왜 미안해 하지 않을까, 왜 이런 상황에서 좋아할까?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이 사람들이 사람이 아닐 수 있다(subhuman)는 인식을 아마 PC(정치적으로 올바른)로 억눌렀을 것이다. 댓글의 인종차별과 비교되는 내 태도에 혹시 도덕적 우월감까지 느꼈을까?

기사만으로 이해가 어려워 인용된 논문을 검색해 보았다. 학술논문인데도 제목은 자극적이다. “그들은 우리를 사람 아닌 것으로 본다 (They See Us as Less Than Human…)” 논문은 3개 대륙(미국, 로마, 이스라엘)에서 수행한 연구를 바탕으로 기술했다. 결론은 다른 집단에 대한 인식의 왜곡이 상호간에 반복되는(reciprocal) 현상이라고 기술한다. 한글 기사가 이야기 하듯 무식한 미국인만의 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만으로는 반복되는 비인간화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물리력, 경제력 등에서 우월한 입장에 있는 인구집단이 먼저 보이는 태도에 비인간화를 경험한 집단이 상대를 비인간화면서 폭력이 정당화된다는 설명이 따른다는 점에서 시작 지점은 있다는 설명이지만)

현상은 기술되었지만 심리적 기전은 제시되지 않았다. 인간은 원래 배타적이고 공격적인데, 그 공격성이 가능하게 만드는 심리적인 기전이 저자의 비인간화인지, 이런 비인간화가 습득된 것인지 설명은 가능할지 모르겠다.
논문을 읽고 나면 마음이 서늘해지기는 하지만, 이 논문 자체에는 어떤 정치적 언급은 없다. 사실을 기록하는 단계 그 도덕적, 정치적 의미를 찾고 실천하는 단계가 별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한글로 쓰는 블로그이니 덧붙인다. 한국인은 너무 배타적이다. 백인이나 흑인이 지나가면 한 번 만져보고 싶지 않은가? ‘얘들도 사람인가?’
물론 사람같지 않은 한국인이 (많이) 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심지어 다른 한국인의 지도자로 자칭한다. 이런 자들에겐 분노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