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생명윤리

보건복지부가 임신중절시술을 한 의사에게 면허정지 처분을 내리겠다는 발표를 한 후(행정처분 예고 링크) – 이걸 저출산 정책으로 내놓는 어리석음이란- 낙태 문제가 제대로 공론화 될 것 같다. 우리 정부가 가진 인권의식 수준을 증명한 셈이다.
여성계와 의료계의 심각한 반발이 뒤따랐고(www.hani.co,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0102214005&code=940601) 정부는 부랴부랴 해명에 나서기는 했지만 (http://www.mohw.go.kr/front_new/al/sal0301vw.jsp?PAR_MENU_ID=04&MENU_ID=0404&page=1&CONT_SEQ=334871) 정말 이 정책이 가진 의미를 몰랐을까?

오늘 소위 기독교생명윤리를 한다는 이들이 이메일을 돌렸다. 내부 문서지. 나는 빼달라고 분명히 이야기 했음에도 나를 포함해서 돌리는 이메일. 낙태 문제에 대한 입장을 수립해야 한다는 젊잖은 이야기. 성숙한 태도와 포용의 제스쳐.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여성성에 대한 폭력. 기가 차서 지웠지만, 곧 다시 복구시켰다. 이런 자료를 지워 둘 수 없어서. (이런 이메일 내용은 기본적으로 비밀을 지켜야 하는 것이니 여기에는 적어두지 않겠다만…)

이 참에 기독교 생명윤리에 관해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기독교는 생명윤리 문제에 어떤 우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는가? 예를 들면 성경에 생명윤리문제에 관한 구체적이며, 오늘날의 지식에 부합하고, 맥락적으로 해당 생명윤리 문제를 직접 다룬, 그런 구절이 있는가 하는 말이다.
성경에 있는 소위 율법은 오늘날 구속력을 상실했다. 십계명 정도가 상징적으로, 일반적인 수준에서, 구속력을 가지고 있을뿐.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생명윤리에 관해 최종적인 규범을 가지고 있다 주장할 수 있을까?

정직한 기독교도라면 이렇게 이야기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 문제가 있군요.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과 사회관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는 것이 옳습니다 정도. 많은 의견 중 하나로. 다만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 생명윤리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을 향한 윤리적 지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보적인 입장을 가져서는 곤란할 것이다.
문제는 확성기의 방향을 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80%에 해당하는 사회 일반을 향할 때 발생한다. 꾸짖는 태도, 비난하는 태도, 정확한 근거 없이 주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기독교의 설득력을 약화시킬 뿐이다. 내 고민은 여전하다. 기독교의 설득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무당, 목사, 합리성에 관해서

 

최근 드러난 청와대의 의사결정과정에 모든 국민이 분노했다. 진실을 드러내어 알리고, 책임을 묻는 일을 국민이 직접 챙기게 생겼다. 명문대학의 학사관리가 공정하지 않다는 문제제기로 시작되었고, 여기에 관련된 어떤 일가가 알고보니 공공의 자원을 사유화하고 있었고, 그것이 사소한 측근 비리가 아니라 대통령의 의사결정때문에 생긴 일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국정이 무당에게 놀아난 셈이라니!

이 과정 모두가 합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보다 한국 사회의 종교성을 걱정하게 된다.

1. 개인적 일탈을 밝혀내야 할 제도와 제도의 관리자들이 사실은 공범이었다.
제도의 문제인지,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문제인지. 만약 학사 관리제도가 작동하지 않고, 사법제도의 견제 기능이 거세되었으며, 공직자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을 충성의 대상으로 생각했기에 문제가 생겼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범죄를 행위자의 문제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지금까지 반복된 비리와 공권력을 덮어쓴 야만의 확대/변형이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런 수준의 개인이 공직을 차지하게 되어 있는 제도다. 고시-정부주도의 경제/사회구조-경쟁과 적대관계로 구성된 인간관계. 끔찍한 상상이지만 이런 구조가 존속하는 한 이런 ‘개인적’ 일탈은 반복될 것이다. 우리 제도는 총체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2. 협박을 통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제도가 개인의 합리성을 보장할 수 없게 된 사회에는 합리적으로 승인받았다는 의미에서, 정당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당한 권력이 없는 세계는 토머스 홉스의 표현을 빌리면, 야수들이 벌이는 전쟁상황이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들 사이의 먹이사슬이었다. 국민 위에 앉아 있던 그들도 먹이사슬을 구성하는 일부에 불과했다는 사실. 국민을 겁박하는 그들 자신도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 이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달성한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는 수십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제도는 이런 문제 앞에 속수무책이다.

3. 대화와 합의가 아닌 믿음이 정치적 결정의 배후에 있다.
우리는 가장 큰 권력을 행사했던 자가 신앙의 허울을 덮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당 놀음이 이 모든 불합리를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 탐욕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은 자뭇 충격적이지만. 무속신앙이라는 말로 그들의 모든 죄를 설명할 수 있을까?

무속인이 아니라 기성 종교인이 대통령을 보좌했다면 우리는 조금 덜 화가 났을까? ‘건전한’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대로 된 교회를 목회하는 남자 목사였다면? 신앙의 도리를 대통령에게 조언하고 대통령이 그의 조언을 따랐다면? 이런 종류에 우호적일 개신교인들은 무엇이라 말할까? 솔직하게 기독교가 바라는 정치참여가 이런 모습은 아닌가? 그 자리를 유사 기독교가 (기독교와 같은 구조를 가졌다는 점에서) 차지했다는 점을 분하게 느끼고 빼앗으려 할까?

신앙은 합리적으로 구성된(끊임없이 개선된다는 가정하에) 제도를 대신할 수 없는 것 같다. 무슨 이유인지 아직 확실하게는 모르겠으나 종교적 원리는 다원화된 사회를 이끌 능력이 없다. 목적과 수단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종교의 특성과 무관한 것 같지 않다. 그것이 내가 최순실 사건을 보면서 갖게 된 불안함의 한 단면이다. 우리 민족은 지나치게 종교적이다.

If I Could Tell You (Wyston Hugh Auden, 1940)

# If I Could Tell You (Wyston Hugh Auden, 1940)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Time only knows the price we have to pay;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시간이 조금 나면 시나 소설도 좀 읽고 글을 남겨두려 했습니다. 그게 몇 달이 지나서야 되네요. 영국 시인 오든(W H Auden)의 시를 처음 올립니다. 우리 말로 잘 번역된 것을 찾기 어려워 직접 번역하는 만용을 부렸으니 이해해 주세요.

시간은 아무말도 하지 않으리라.

내가 말할 수 있다면 (W H 오든, 1940)
시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시간만이 우리 갚을 대가를 알고 있다.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을 것이다.

어릿광대가 놀음을 시작할 때 울어야 할지,
음악가가 연주할 때 더듬거려야 할지,
시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말했다.

말할 수 있는 운명이 더는 없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말보다 품은 사랑이 더 크기에,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올 때, 시작한 곳 어딘가 있으리라.
잎새가 마를 때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시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장미는 진정으로 자라고자 할 것이다.
환상은 환상으로 머무르기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으리라.

사자(獅子)들이 일어서 어디로 가고
멈추지 않는 흐름과 용사들이 멀리 사라진다 해보자.
그때도 시간은 아무 말 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고 할까?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으리라.

——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알았으리라.

2차세계대전의 참화 속에 쓰여진 시. 젊은이들의 죽음을 경험한 , 그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살았기 때문에 경험한 아이러니를 담아낸 시. 진실 혹은 진리는 답하지 않는 현실의 무게.

“Time only knows… but will say nothing.” 우리는 진실에게서 어떤 감정도 위로도 기대할 수 없다. 진리는 저기에 그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위로를 구하지만 차가운 대답만이 돌아온다. 게다가 시간이 전하는 깨달음이란, 대책을 세울 수 없는 것. 막상 닥친 후에야, 그렇게 되고 난 후에야 ‘그렇구나’라고 탄식하게 되는 것. “I told you so.” 혹시 우리가 살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대가를 알면 심판의 순간을 피할 수 있을까? (이 말을 하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다. 아마 신(神)일 수도 있다. 그렇게 엄숙하기에 우리는 아무 대답을 찾을 수 없으리라).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은, 답을 하려 애쓰지만 그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할 뿐이다. 그리고 이 무지의 고백이 이 시를 끌어가는 주제다. 물론 사랑으로 (4연) 극복을 시도하지만 시인-인간은 역부족이다 (2-6연의 중심에 4연이 자리잡고 있다. 4연은 인간성의 상징이다).

2연. 죽음은 젊음과 노인의 시절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기에 우리는 어릿광대를 보고 깔깔대는 아이를 보면서, 혹은 노련한 음악가의 연주를 보면서 울지, 혹은 아연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3연. 찰나에 불과한 우리 인생도, 그 인생의 사그러듦도, 세상 모든 것에는 까닭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나, 나 역시 모른다고 고백할 밖에.

5연. 젊음의 아름다움 (roses)도 노년의 변화도(vision) -환상은 노년의 것이다. 젊음은 그 아름다움에 자신을 질식시키기 마련이기에, 변혁은 노인의 것이다 (기독교적 비전)- 그저 머무르다 떠나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고 싶어하는 우리지만, 어떻게 하겠나.

6연. 운명에 저항하는 일을 결국 멈출 것이다. 사자도 용사도 멈추지 않는 흐름마저도, 모든 것이 떠난 후에도 대체 무엇이 남을까? 그렇게 저항하지 않는다면 시간의 엄숙한 선고는 그 힘을 갖게 될까? 그리 되기를 바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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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I Could Tell You (Wyston Hugh Auden, 1940)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Time only knows the price we have to pay;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If we should weep when clowns put on their show,
If we should stumble when musicians play,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If we should weep when clowns put on their show,
If we should stumble when musicians play,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There are no fortunes to be told, although,
Because I love you more than I can say,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The winds must come from somewhere when they blow,
There must be reasons why the leaves decay;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Perhaps the roses really want to grow,
The vision seriously intends to stay;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Suppose the lions all get up and go,
And all the brooks and soldiers run away;
Will Time will say nothing but I told you so?
If I could tell you I would let you know.

인간에 대한 예의

책임져야할 부조리 – 죽음 – 동정 – 책임질 사람들의 침묵 – 동정없는 비난 – 잊혀짐…
억울한 죽음이 반복된다. 책임지는 사람도, 용서를 구하는 사람도 없어 억울하지만 죽은 것이 억울하다. 멀쩡히 먹고 다니고 싸우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 죽었다.
이런 죽음이 어떻게 없겠냐고 누군가 말한다. (심지어 억울한 죽음마저도) 통계에 불과하다라는 말이겠지. 석가모니 부처님도 (비록 타인의 죽음이겠지만) 죽음이 없는 삶이 없다고 말씀하셨단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죽음과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을 슬퍼하셨다. 함께 고통받는 모든 존재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셨다. 부처님은 통계를 들먹이는 자들, 나라도 살아야겠다고 지껄이는 자들, 동정없는 자들과 같은 의미에서 죽음이 일상이라는 말을 하신 것이 아니다.
모든 죽음은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는 시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누군가 나와 꾸벅 절하고, 돈을 쥐어준다고 낫지 않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억울한 죽음이라면 더욱더.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그 이들의 삶을 더 생생하게 살려내는 일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일이다. 그러나 완전히 잊혀질 수도 없고, 그때마다 아플 것이다. 그게 우리 먼저 떠난 이들의 억울한 죽음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일이다.
한가지 더, 동정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이, 그 사람에게만 발견되는 진리가 있다. 동정할 수 없는 인간은 병든 인간, 하나님이 주신 그분의 형상을 지워버린 반역자다.

죽음보다 더 나쁜 죽음의 과정

죽음보다 더 나쁜 죽어가는 과정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죽음 이후의 삶은 이야기 하거나 어떻게 좋고/나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죽음을 나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경험이기 때문에, 문제는 과정에 있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죽음의 두려움, 질병의 고통, 그리고 쇠약함과 상실이 어떤 의미에서 좋다고 할 수 있을까? 혹시 죽음의 고통이 우리를 깨우치는 죽비(竹扉)와 같아서 삶의 본질과 생물학적 삶을 넘어서는 인간의 숭고함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해도, 이런 지식은 몰라도 되는 것 아닌가? 해결책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기에 지친 나머지 사소한 깨달음을, 그 사소함에는 눈을 감은 채, 인생의 비밀이라도 되는 듯 자기 위안으로 삼은 것 아닐까? 죽음은 인간의 삶을 인간의 것으로 만드는 종류의 경험을 영구히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나쁘다. 그리고 피할 방법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죽음의 과정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의학자들에게 죽음의 과정은 어떤 학술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철학자, 신학자들은 안락사니 뇌사니 하는 이야기만 한다. 이해는 된다. 의학적으로 죽음의 과정은 의학의 한계와 의사들의 실패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게다가 죽음의 과정에서 무엇이 더 나은 의학적 조치인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설문도 할 수 없고 혈액검사도 의미없으니. 실천(practice)에 경험없는,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탁상 철학자들에게 죽음의 과정은 너무 낯선 과정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과정이야 말로 우리가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는 과정이기에, 그리고 죽음에 관해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기간이기에 이 시기를 우리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의학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의학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죽어가는 사람의 필요에 맞춘 의료나 돌봄이 중요하다는 것은 호스피스-완화의료를 받은 암환자들이 죽을 때까지 항암치료를 받았던 환자들보다 (비록 몇일에 불과하지만) 더 오래 살았다는 보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몇 일을 더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수명에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통증완화를 포함한 전인적 돌봄을 받은 사람들이 끝까지 병과 ‘전쟁을 벌였던’ 사람들만큼 살았다는 점이다. 인간의 몸은 어찌 보면 떠날 때를 알고 준비하는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경망스럽게 이런저런 짓거리를 하는지 모르지만…
따라서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정말로 불편하게 느끼는 경험과,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더 편안하고, 명료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의사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의사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의학교육 과정에서 죽음에 관한 교육은 포함되지 않는다. 죽음에 관한 (의학적) 내용은 공식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사 개인이 경험을 바탕으로 배운다.(fn) 의사들이 죽음의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것은, 의사들이 발생과 동시에 사회적, 문화적 현상까지 포함하는 사건이 되는 죽음에는 무력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죽음의 과정에 수반되는 불편함과 그해결방법알지 못하는 의사는 정작 필요한 순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달리 표현하면, 죽음을 앞둔 환자는 의학이 부재한 지점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의 과정은 질병의 진행과 분리하기 어렵다. 물론 이것이 의학적 이해의 한계이기도 하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기는 여러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신체 변화와 그 기전을 이해하면 조금이라도 신체적으로 편안하게 할 수 있다. 죽어가는 몸은 건강할 때, 혹은 병든 신체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다르다. 죽음이 닥쳐올 때 우리 몸은 꼭 필요한 기능은 유지하지만 길게 볼 때 중요하지 않은 기능은 더이상 유지하지 않는다. 그 중에 소화기능이 있다. 건강한 사람은 끼니를 거르면 불편함을 느끼고 여러 끼니를 (무슨 이유에서든) 건너게 되면 고통을 경험하지만,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음식을 소화시키는 일이 부담스러워진다. 그래서 쇠약한 환자에게 음식을 주입하게 되면 설사나 소화불량, 심지어 구토까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몸은 더 이상 허기를 느끼지 않고 끼니를 거르는 일이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게 된다. 몸이 천천히 가벼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식이가 필요하고, 소화할 수 있다면, 우리 몸은 음식을 원할 것이다. 우리 몸이 보내는 이런 신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어떤 변화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쇠약하거나 의식이 희미해져 움직임이 줄어든 사람은 근육양이 줄고 인대가 탄력을 잃게 되어 (소위 구축이라고 하는 현상) 통증을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움직임이 줄어들면 혈액뿐 아니라 림프액 등도 적절하게 순환되지 않아 불편하게 만든다. 임종이 다가온 사람이라도 마사지와 관절운동을 통해 구축을 예방하고 체액을 순환시키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종(種)이다.

환자를 돌보는 일은 그의 마지막 경험을 경험할만하게 바꾸는 것에 목표를 둔 활동이 되어야 한다. 불필요한 불편함과 통증, 심리적 고통이 없도록 하는 돌봄뿐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의 삶을 정돈할 수 있도록 – 그렇게 가치를 만들도록 격려하고 함께 하는 일이 돌봄이다. 그런데 병으로 자녀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 많은 노년은 의학적 돌봄뿐 아니라 인격적 돌봄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남아 있는 사람이 “불효자는 웁니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만큼 희생한 후에야 중단되는 오늘날의 치료 현장은 사실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무지, 혹은 사랑이 없어 부모의 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부당하게 요구하는 자식들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면 분개하지만 정작 오늘날 더 편만한 악행, 불필요한 치료로 고통을 안기는 자식들에게는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자녀들은, 부모의 뜻을 알아볼 여지가 없이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치료를 계속한다. 이런 행동은 그들이 충분하게 효도했다고 생각할 때까지, 주변의 누군가 그만하면 효도한 것이라고 말해줄 때까지 계속된다.

불효자가 될 때까지 치료해야 하는 의료는 분명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생각해 보자. 의료는 환자의 고통을 지식과 기술로 줄이는 행위다. 의료가 그 방법을 찾지 않으니, 그리고 적절하게 제공하지 않으니 환자도, 그 자녀들도, 결국엔 의료인들도 고통을 겪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의 경험

# 좋은 죽음이란 어려운 일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인생의 결승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의 길이가 길고 짧은 차이가 있고 약간 평탄하거나 가파른 경기장을 달렸는가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모든 사람의 인생은 분명히 끝이 있는 달리기 경주다. 장거리 경주 순위는 마지막 스퍼트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선수는 기진한 상황에서도 힘을 다해 지금껏 애쓴 성과물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죽어가는 사람의 경험을 이 마지막 질주에 비유하면 심한 비유가 될까? 잘 살기도, 유행하는 말대로 웰빙하기도, 힘들지만 마지막 순간에 균형을 잃고 삶이 형편없어지기는 너무 쉽다. 이전까지 보잘 것 없는 삶이었다 해도 죽음의 순간에 빛이 날 수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마지막 질주는 정말 힘들다.
좋은 죽음을 생각한다면,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어떤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다 한 순간에 꺼지는 것을 이상적인 죽음으로 여기고, 그렇게 죽음을 최대한 뒤로 미루었다가 조금만 경험하기를 바라는 우리 사회의 모순적인 태도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떨쳐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증명할 뿐이며, 우리 사회에서는 죽음의 과정이 더욱 길어지고 있을 뿐이다. 물론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의 사회학자 아서 프랭크는 건강하지만 죽음이나 중병의 공포를 떨쳐내지 못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삶을 관해사회(remission society)라는 표현에 담아낸다. 오늘날 우리는 건강한 것이 아니라 질병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fn).

# 소외(疎外)
죽어가는 사람은, 우리 의료환경 내에서는 정말 길고 어려운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환자가 아니라 (심지어 의사도 아닌)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구성된 의료체계가 원인이다. 우리의 의료체계는 환자를 사연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질병인 것처럼 생각한다. 의료계에서 흔히 하지 말라는 말 중에 “몇 호 간암 말이지… ”라는 표현이 있다. 질병으로 불리우는 환자는 의료진에게 인격체로 대우받을 가능성이 없다. 이런 악습이야 외형적으로는 거의 없어졌지만, 의료진은 여전히 환자를 볼 때 그 인격이 아니라 질병을 떠올리고 환자의 검사 결과를 먼저 기억한다. 한편 의료기관은, 조직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럴 것이다, 환자의 개인적 필요에 맞추어 기관이 제공하는 의료서비스를 유연하게 변경시킬 수 없는데, 때가 되면 예외없이 식사가, 회진이, 검사가 따른다. 만약 개별 기관이 맞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면 의료전달체계라도 효과적으로 환자의 필요에 대응해야 하겠지만 우리의 의료전달체계는 사실상 붕괴된 상황이어서 환자 보호자가 백방으로 수소문해야 하는 처지다.
환자가 소외되는 것은 의료서비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병에 걸린 환자는, 가족과 의료진에 의해 병이라는 현상으로부터 차단되고 만다. 병은 생물학적 현상이지만, 병에는 가족, 직장, 교우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변화의 끝에는 환자가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의 변화가 기다리고 있다. 죽음을 조금이라도 나은 경험으로 바꾸려면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수용할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의료현실은 환자를 질병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효심 때문일 수도 있고, 치료가 아니라 치료비를 걱정해야 하는 실패한 의료체계 때문일수도 있고, 그저 직면하기 어려운 현실을 피하고 보는 인지상정 때문일수도 있겠다. 선의이든 어리석음이든 우리는 정보와 선택으로부터 환자를 소외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 환자가 소외된 결정
죽음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사람은 흔하지 않다.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 방식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흔히 삶과 죽음 중 택일하라는 식의 이야기가 전개되곤 한다. 다른 방법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은 제시한 치료법을 부정하고 의료진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고 만다. 그러면 누구라도 삶을, 치료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치료 방법, 예상되는 결과, 대안 등을 허심탄회하게 상의하는 설명동의 절차가 형식적인 의료현장에서 진정한 선택은 중환자실에 들어가서야, 또는 모든 치료방법을 소진한 후, 그것도 죽음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나 내려야 할 대상이 된다. 이렇게 내리는 의사결정이란 사실 선택이나 결정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이다.
물론 노인 환자라면 자기 의사를 끝까지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이런 환자를 취약한 환자라고 부른다). 질병과 치료에 관한 지식을 모두 이해하기 어렵고, 이미 많은 경우 가족에게 의존하고 있는 노인들은, 특히 죽음의 위협을 몸소 느끼는 상황에서, 가족에게 이 과정을 맡길 것을 요구받고 있다. 결국 (가족 중심의 문화 영향도 있을 것인데) 환자 본인이 직접 의사결정을 내리기 보다 가족을 통한 간접적인 결정이 흔하다. 그런데, 가족의 결정은 예후와 고통을 일차적인 고려사항으로 삼지, 환자의 평소 가치관이 우선하지 않는다. 이 말은 환자의 뜻을 바탕으로 하기 보다 치료가 도움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직접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는 호스피스를 포함한 많은 말기-임종기 (생의 마지막 시기) 의사결정이 환자 본인의 뜻을 ‘직접’ 반영하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다.

대체 왜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환자를 소외시킨 채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두 가지 가정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환자의 뜻이 보통 가족의 결정과 합치할 것이라는 가정이다. 둘째 가족이 환자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가정이다. 환자의 뜻이 가족의 결정과 합치할 것이라는 가정부터 살펴보자. 우리는 가족과 환자를 동일한 의사결정 단위로 간주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의 대리 결정이 이 법을 통해 모순이 발견되고 해결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물론 환자 본인의 뜻은 어디까지 관철되어야 할 것인지, 환자의 결정을 어떻게 합리적이거나, 최소한 삶의 태도와 일관되게 할 수 있을지의 또다른 문제가 따른다. 그리고 이 법은 환자 본인의 뜻이 특별히 강조되기 어렵다. (무의미함에 대한 전제가 있기 때문에) 두번째 가정, 가족의 결정이 환자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것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가족은 환자의 이익을 목표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목표하는 것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가족이 명확히 알고 있는가, 가족 내부의 고민과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한편 의료진도 정보와 의견을 제시하나,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의료진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는 보호자를 설득해서 자신의 뜻에 따르게 만들려는 것이다. 환자나 가족이 정보를 이해하고 올바른 선택을 내리도록 돕는데 있어 적극적이지 않다.

## 선택 소외
환자는 결정을 내릴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죽음의 과정에 들어선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가족에게 알릴 기회를 찾지 못했을 뿐이지 죽음이 가까왔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불길한 것으로 여기는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는- 사회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자녀들은 ‘경망’스러운 행동으로 간주된다. 또 노인이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만’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어쨌든 환자는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소외되지 않은 결정, 좋은 결정이란 무엇인가? 좋은 결정은 (1)정보, (2)가치관, 그리고 (3)자발성이라는 요소를 가진 것이다. 질병의 종류와 예후에 대한 반드시 알아야 할 정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 더 알고 싶은지 자유롭게 대화 나눌 수 있도록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가 안에서 상담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정보에는 치료 방법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환자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도록 예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의료진의 제안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과정이 따르게 된다. 분명히 좋은 결정은 객관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판단은 개인의 기준에 따라 내려져야 한다. 개인이 최종적인 잣대가 되어야 할 것인데, 삶에서 중요한 것, 유지하고 싶은 가치, 중요한 관계 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개인적 가치관은 질병이 발병하기 이전, 죽음의 가능성으로 고통 당하기 전에 확인하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적으로 죽음이 우리에게 선생이 되고 더 나은 선택으로 이끄는 것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의 확인 과정에서 죽음에 압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변의 시선이나 기대에서 자유롭게, 자신에게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특히 부족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죽음을 앞둔 가장 심각한 시점에 내린 결정이라면 그 결정의 내용이 무엇이든 일단 존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이렇게 존중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내린 결정이 자발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우리 의료체계 내에서는 심각하게 결여되어 죽음의 시점에 내린 결정을 믿기 어렵게 만든다.

# 결과 : 적절한 치료기회의 박탈
환자의 결정권에 관해서 우리는 흥미로운 주장을 듣는다. 바로 환자는 정보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족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가치관이 부족하기 때문에 믿을만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가족은 치료에 있어서만큼은 제삼자에 불과하다. 의료진은 환자에게 무관심하고 의료집착적이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기술적인 차원에서만 의견을 제시하라. 이해당사자를 모두 부정하는 이 주장은 대체 무엇을 주장하려는 것인지!
환자는 당연한 권리를 박탈 당했고, 가족이나 의료진에게는 정당한 결정권이 없는 상황에서 죽어가는 환자가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어느 누구도 권리에 따르는 책임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치료 결정은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안전한 치료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에 추가적인 고통만을 더하는, 죽음보다 더 나쁜 상황을 가져올 뿐이다.

죽음보다 나쁜 것이 있는가?

경험의 종결때문에 죽음이 나쁘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살아 있어도 죽음과 다름 없는 상태가 있다. 둘째 죽음과 다름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나쁜 일이 닥친다면, 그 사람은 죽음보다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셋째 어떤 사람이 신체적 생명의 유지를 포기하고 동시에 고통이나 불편함, 경험없는 생존도 함께 포기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이 더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 경험이 없는 상황
첫째, 죽음과 다름없는 상황이 있다. 앞에서 살아 있어서 좋은 것은, 긍정적이거나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할 수 있도록 하는 경험 때문이라는 점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경험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뇌가 담당하는 이성이나 감성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뇌사 상태가 되어, 혹은 뇌의 기능 일부만이 유지된 지속적 식물 상태가 되어, 이성과 감성 기능을 잃은 채 껍데기와 같이 된다면? 그 사람에게는 살아 있어서 좋은 점이 없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의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생명이 그 자체로 좋다, 혹은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는, 증명되지 않은, 주장뿐이다. 생명의 좋은 점 – 또는 죽음의 나쁜 점-을 바탕으로 하는 주장은 아닌 것이다.

# 죽음보다 더 나쁜 상황
둘째, 죽음과 다름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나쁜 경험만이 계속된다면? 여기서 나쁜 경험이란 통증이나 불편함, 그리고 비인격적 대우와 같은 것으로 이를 경험하는 사람의 처지를 더 낫게 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어떤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암이든 노령으로 인한 쇠약함이든) 죽어가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할 경우 그 성공률은 극히 낮다. 반명 심폐소생술로 인한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미 의미있는 경험 없이, 죽어가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로 인한 고통을 더하는 것은 죽음에 (무엇이든 더할 수 있다면) 더 한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다. 또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불필요한 고통만을 더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실 죽음을 앞두고 경험을 상실했다는 가정보다 더 나쁜 행동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 선택의 합리성
셋째, 자신에게 닥칠 나쁜 일의 연속을 예측한 어떤 사람이, 이런 경험 없이 죽음을 맞겠다고 판단하고 불필요한 조치를 거부한다면 이런 거부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 죽음을 예상하고 내린 이런 결정을 존중하기 않는 것은 불필요한 경험만을 더하는 악행이다. 이 주장에는 만약 극심한 고통을 예측하는 사람이, 죽음이 닥치는 시점을 (안락사나 의사조력자살 등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함의점이 있다. 이 점은 추후에 살펴보자.

지금까지 전개한 주장은 뇌사 상태나 지속적 식물 상태를 죽음으로 정의하지 않고도 이런 상태에 놓인 개인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비록 죽음이란 어떤 추측도 거부하는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죽음을 나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 내고 나니 죽음보다 더한 상황도 있음과 죽어가는 사람을 돌봄에 있어 경험에 집중해야 할 필요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어가는 사람의 경험에 집중한 돌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음은 왜 나쁜가

# 들어가는 말

죽음에 관련된 다양한 현상을 연구하는 타나톨로지(thanatology)라는 학문분야가 있다. 죽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타나토스(thanatos)를 뿌리로 한 신조어다. 우리나라에도 관련된 연구자들이 있는데, 학문 분야에 붙일 적절한 우리말 번역어가 없어서 죽음학, 생사학(生死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고, 그냥 타나톨로지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연구자들이 있음에도 이들이 모두 인정해야 할 것은 죽음 자체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죽음학에 관한 많은 연구는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두려워하고 어떻게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과 친지들이 어떻게 그 슬픔을 표현하여 나누며, 결국 극복해내는가에 관한 것이다. 흥미로운 분야이지만 정작 죽음 자체에 대해선 해 줄 별다른 이야기가 없는 셈이다. 죽음에 관해서 무슨 말을 덧붙인다고 해도 믿음, 추측, 사변에 불과한 것이고, 기껏 인간이 죽음에 관해서 할 수 있는 말이란 죽음을 둘러싼 현상에 제한되어 있을뿐이다.

## 죽음이 아니라 죽음과 죽어감이다.

죽음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사실 없다. 죽은 사람과 이야기 나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죽은 후에 어떤 경험을 하는지- 염라대왕이 있는지, 요단강을 건너는지,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또 죽은 사람은 어떻게 바뀌는지도 알 수 없다.
아니, 우리는 죽어버린 사람의 신체가 어떻게 변하는지는 알고 있다. 또 죽음을 앞둔 몸은 어떻게 변하는지도 알고 있다. 오늘날 죽음에 관한 논의는 죽음을 앞둔 몸의 변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심장 박동, 호흡, 뇌의 기능과 다른 신체의 변화 중에 중요한 것을 찾아내고 어떤 변화가 죽은 사람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의학에서는 심장 박동이 멎고, 숨을 쉬지 않으며, 뇌의 기초적 기능이 없어진 상황을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뇌사나 심장사에 관한 논의는 어떤 변화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죽음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죽었다고 판별하는 일은 죽음을 둘러싼 변화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있는 심장, 허파 그리고 정신의 기능이 없어지는 것으로 죽음을 정의하지, 죽은 사람에게 생기는 일로 죽음을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구체적인 대상에 관한 이야기일 수 없다. 대신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죽어감에 관한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심장 박동과 숨이 멎는 일, 뇌가 제 기능을 잃는 일은 죽어가는 과정 중에 생기는 일이며, 이것은 의학이 알고 있다.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죽어감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돌보는 사람도, 죽은 사람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감과 죽음을 구별해서 생각해야 한다.

# 죽음에 관해서 – 죽음은 왜 나쁜가?
죽음 그 자체가 나쁜지 좋은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의식이 있는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회피한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모든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변화에 들어서는 관문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종교적 가르침이 이런 점을 지적한다. 출산을 앞둔 여성이 산고(産苦)를 두려워하지만 아이를 안는 기쁨으로 보상을 받는다고 지적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라.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음으로 죽음이 좋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죽음의 순간 이후에 관한 소망을 고백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죽음은 좋은가 나쁜가? 죽음에 관한 우리의 가치판단도 죽어감(dying)이라는 맥락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삶을 누릴 수 없게 되면 나쁜 경험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죽음이 나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 가능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1)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갖춘 모든 사람들이 싫어한다, (2) 신체가 부패하고 소멸한다, (3) 지금 누리는 것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다. 이밖에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는다 (지옥에 간다)도 생각할 수 있지만 심판이란 (최선의 해석으로 보아도) 일종의 자연법칙이니 좋고 나쁘다는 평가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일단 세 가지 가능한 이유를 하나씩 살펴보자.
## 다른 사람들도 싫어한다.
어떤 판단을 내릴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예를 따르는 것은 보통 안전한 일이다. 하물며 죽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에서야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더욱 그럴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고, 그 사람들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건대 죽음은 고통스럽고 나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앞둔 많은 사람들은 의식이 흐려지면서 헛것을 보는 섬망(delirium)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하며, 숨쉬기 어려워져 큰 소리를 내는 독특한 호흡을 하거나,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죽음을 앞두고 경험하게 되는 현상 때문에 그 끝에 있는 죽음도 나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게 합리적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들은 죽음에 관해 아무 것이라도 알고 있는 것이 있나? 중요한 문제라고 그래서 더 신중해야 한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한 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최근의 임사체험 보고, 죽음을 담담하게 마주하는 이들의 모습은 죽음이 정말 나쁘기만 한 것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이런 사례는, 비록 예외적이지만, 죽음이 좋은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가?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한 태도로 죽음이 나쁜지/좋은지 판단하는 일은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닐 수도 있겠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싫어한다는 것은 죽음이 나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수는 있겠지만, 죽음이 나쁜 이유는 되지 않는다.

## 신체가 부패하고 소멸한다
부패하여 소멸하는 육체만큼 죽음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이 있을까? 육체가 사그러지는 과정에서 육체의 주인이 살며 누렸던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열정과 성취도 함께 잊혀진다. 그래서 종교적 가르침은 썩어 문드러지는 육체를 그려 모든 일이 영원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도 죽음을 두려워할 좋은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렇게 드러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몫이지 죽은 사람의 일은 아니다. 죽은 사람의 직접적인 경험이 아닌, 주변 사람의 두려움과 상실감으로 죽음 자체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답변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어떤 종교는 살아서 했던 모든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순간이 온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신체의 부패가 죽음을 나쁜 무엇으로 만든다면, 죽은 후에도 살아있던 시기에 누리던 종류의 신체를 필요로 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 가정을 유지하기란, 죽음 후의 세계를 믿는 사람에게도 어렵다.
신체가 부패하고 소멸하는 것이 죽음의 경험의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가르쳐준다. 오랜 가르침들은 인간의 본질을 정신적인 것에서 찾았다. 그것이 영혼일지, 이성과 합리성인지, 아니면 뇌가 만들어낸 다른 무엇일지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신체가 인간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아니, 신체는 인간에게 있어 제한된 일부분일지도 모르겠다.

## 좋고 (나쁜) 경험을 누릴 수 없게 된다
인생은 고해(苦海)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례는 없는 것 같다. 사람은 불만이란 있을 수 없는 조건에서도 불행할 재능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나쁜 경험은 좋은 경험으로 극복되거나, 잊혀질 수 있는 것이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고통도 그 시간이 지난 후 우리를 맞아 줄 무엇에 대한 기대로 극복해 낼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은 기대의 종결을 의미한다. 적어도 우리가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종류의 경험은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아무런 경험이 없는 인간이 무엇인지 우리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죽음이 인간에게서 앗아가는 경험의 가능성이 죽음을 나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일 수도 있겠다. 경험할 능력을 잃는 것은 지금껏 살펴본 후보 중에서 유일하게 죽은 사람에게 생기는 일이다.
인간은 경험과 그 경험에 관한 기억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한 번 살펴보자. 지금의 내가, 비록 그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인격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 아닌가? 사실 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역할에 맞추어, 때로는 갑자기 생겨난 선의(善意)나 심술 때문에… 태도가 변하고 판단이 변한다. 우리 신체는 어떤가? 몸을 구성하는 원자 중에 태어나던 순간부터 가지고 있던 것은 얼마나 될까? 이렇게 허술한 인간 존재를 하나로 엮는 것은, 인간 종이 물려주는 DNA의 기억, 내가 스스로 쌓은 삶의 기억, 신체가 기억하는 내 습관과 반응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태어나던 시점으로 돌아가도, 여전히 나다. 그것은 내게 생긴 일을 내 일로 느끼고 반응하는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 아니 살아있기 때문에 그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은 그 경험을 앗아간다.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은 경험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내 경험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되어 생긴 반응이다. 지금의 고통이 지난 후 나를 찾을 가족의 따스한 손길,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우는 음식의 포근함, 이런 쾌락을 기대할 내 기억이 없어진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다. 죽음이 나쁘다면, 삶의 허약함과 찰나성, 자연의 불공평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모두가 갈구하는 좋은 경험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천국을 신앙하는 사람이라도, 그와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는 이별하는 것이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경험이 이제는 끝났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유물론을 신봉하는 이들은 죽은 인간은 더 이상 느낄 것이 없으니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로마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런 관점이 존재했고, 우리 머리는 이 지적에 동의한다. 가슴은 거부하지만. 그러나 이들도 죽음 자체가 좋은지 나쁜지에 답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죽어버린 사람은, 유물론의 관점에서, 나쁘고 좋은 것을 알 수 없겠지만 그 사람도 경험의 가능성을 잃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즉 그에게도 죽음은 나쁜 것이다. 죽은 후에 가능성의 상실로 고통을 당하는지 여부는 다른 문제다. 죽음의 순간 닥치는 가능성의 상실이 문제다.
그리고 경험의 가능성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경험의 질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 누구도 나쁜 경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라. 나쁜 경험이 혹시라도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이후에 따르는 깨달음에 관계된 것이다. 혹은 나쁜 경험에 연관된 의미있는 경험 – 분만의 고통을 들었다-과 관련된 것이다. 만약 나쁜 경험이 더 나쁜 경험으로 연속될 뿐이라면, 그런 경험의 상실 때문에 죽음이 나쁘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보다 나쁜 상항이 있을 수 있음도 짐작할 수 있다.

누가 듣는가?

오늘 읽은 도덕경 70장

”내 말은 이해하기 심히 쉽고, 행하기 쉽다. (그러나) 천하는 능히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다.
(이는) 내 말에 원칙이 있고, 내 법에 권위가 있으나, 이를 알지 못하기에 사람들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를 아는 자는 드물고, 그래서 나는 귀하다.
하여 성인은 비록 거죽 옷을 입어도 귀한 옥을 속에 품었던 것이다”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言有宗 事有君 夫唯無知 是以不我知知我者希 則我者貴是以聖人被褐懷玉

이런 선언, 나(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리석다는 선언은 여러번 들었다.
(나 역시 오늘도 생명윤리에 관한 일부의 행동을 SNS에서 접하며 왜 이리 무지한지 궁금해 했다. 과대망상이 없음에도)

그런데 이런 선언은 공정한가? 그저 푸념아닌가? “너희는 모르고 있다. 앎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내 말을 아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다.”
(그렇다. 진리를 아는 것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진리가 무엇인지에 달려있긴 하다만.)

이런 선언을 하는 이들의 주장은 결국 상대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말이 참이라는 것이다. 좋다. 많이 양보해서 그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그런데 대부분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보자. 이들은 무시하는가? (어떤 이들은 어떤 종류의 무지는 의도적이라고 비난한다.) 아니면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인가? 만약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소쥐 진리를 품은자들의 비난은 대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의심하는 것이 있다. 만약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람들이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참이 될 수 있는가? 게다가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무엇이 된다면?

좋은 죽음에 관해서

이곳에 와서 할 수 있는 것이 쓰는 일이니까, 미뤄두었던 책임을 해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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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죽음에 관하여
죽음 이야기가 더 이상 민망하지 않게 되었다. 간간히 티브이에서나 보던 존경스러운 죽음과 대조되는 남들이 들을까 목소리를 낮추어 전해야 하던 죽어가던 친지의 모습은,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인데도, 경박하게 들렸다. 나는 어떻게 죽고 싶다는 말은 큰 용기를 내어야 겨우 꺼낼 수 있던, 그리고 결국엔 큰 소리가 날 것을 각오해야 하는 사정이었다. 지난 십여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죽음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하긴 우리 사회만큼 급히 바뀌는 곳도 없구나.
하지만 여전히 죽음은 작정해야 꺼낼 수 있는 이야기거리임이 분명하다. 원래 그렇다. 게다가 우리는 효 개념을 오해하고, 철학자들은 죽음을 어떻게 이름붙여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 아직도 병원은, 기껏 몇 십년 밖에 안된, 관성에 따라, 모순적인 의료행위를 계속한다.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 하게 되었으나 대체 좋은 죽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에 대해서 혼자 고민하고 실수만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밖에 없는 죽음인데도.
제도는 어떤가? 90년대 중반에 우리에게 소개된 외국 제도는 한편 혼란만 더해준 것이 아닌가 염려 하게 된다. 외국과 우리의 문화 차이, 의료 관행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형식을 들여오면서 생긴 일이다. 우리 사회의 경직성을 이야기 해야 한다. 원래 어렵게 변하는 것도 있게 마련이나 오래된 것이라고 꼭 좋은 것이 아니다. 대체 우리 관행, 법률 해석의 문제, 전통과 윤리의 무기력 등이 그것이다. 담론을 통해 제도와 인식을 바꾸기 보다 기존의 이해에 고착하는 것은 되려 전통과 윤리를 무력하게 만들 뿐이다. 바뀌는 죽음과 의료의 풍경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문제는 사회구조에 내재되어 있다. 너무 거창한 이야기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바뀌지 않으면 나도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 번 생각해 보자. 미국의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은 사회구조가 개인이 택한 선택의 결과라고 지적한다(아이리스 영/허라금 등.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p120).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우리는 옷 한 벌 사는데도 타인의 평가를 걱정하고 있지 않나. 그렇게 만든 내 선택은 다시 다른 사람의 선택을 제한하고…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면 내가 내리게 될 선택은 더 강한 족쇄가 되니까. 시각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 내 선택이 다른 사람의 선택을 결정하게 된다면, 나는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획기적인 변화는 아닐 수 있어도 작은 뒤틀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이것이 축적되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을테니까.
제대로 바꾸려면, 정확히 알고 바르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그 일을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