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쉬피오(Alain Supiot)의 “법률적 인간의 출현(글항아리, 2015)”을 읽다가…
그는 인간복제를 인격의 개별성과 역사성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이렇게 강력히 비난한다.
“자기복제를 할 수 있다는 기대는 우리를 세대적 고리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다른 성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영원불멸의 삶을 약속함으로써 인간 조건의 세 가지 한계를 일거에 말소시켜버린다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 인간 복제가 언제나 결국에는 파국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상식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는 이 같은 소재가 상상력의 소산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반동적이어서 ‘원본’ 혹은 ‘사본’의 죽음으로 끝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 인간 복제는 여느 기술적 구상과 다르다. 복제는 자연 계 내에서 인간의 행동을 제한하는 한계선을 넓히는 데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한계 자체의 제거를 추구한다. … 자신의 모습을 본떠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은 마침내 가장 어리석은 꿈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pp52~54)
이 ‘상식적’인 주장은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딱하게 읽혔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면하는 장치로 생식을 통해 다음 세대를 돌보며, 이 생식을 이성의 도움을 통해 얻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인간복제에 대한 비판을 끌어내는 과정의 문제가 있다.
일단 인간복제가 두 존재 사이의 관계 문제라는 사실에서 시작해 보자. 그리고 성체와 복제된 개체(아마도 배아,태아,영아 중 하나겠지) 사이의 관계에서 권력이 기울어 진다는 사실도 확인해 두자. 성체는 어떤 목적을 두고 복제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복제 행위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동기에서 이루어지는가? 둘러서 이야기 하지 말자. 모든 복제연구와 복제 시도가 영생하려고 하는 것인가? 답은 비교적 분명하다. 아니오.
혹, 영생하려는 동기를 인정해 보자. 그러면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성을 폐지하려는 시도가 아닌지 의심해야 할 것이다. 이게 흐름이다. 하지만, 정말 한계는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주는가? 쉬피오는 기꺼이 그렇다고 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니까.
그렇지만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인간성을 파괴하는가? 인간의 본래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타인과의 관계성은 중요한 요소이긴 하다. 그리고 관계성은 부분적으로 한계와 관련된 현상- 죽음, 생식,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는 생각은 쉬피오의 생각일뿐이다. 예를 들어 우정이라는 관계는 죽음, 생식, 의존성에서 자유로운 관계다. 그리고 이 관계는 거듭 칭송되어 왔다.
한편 쉬피오의 논의에는 한계가 없어져,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 존재가 된 인간이 폭주하게 될 것이라는 염려가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기술이 가능해 진다고 인간이 변화될 것이라는 예측은 지금껏 틀려왔다. 시험관 아기는 인간의 오만(휴브리스)의 상징처럼 비난받았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기술로 활용되고 있다. 예컨대 기술에 너무 심각한 혐의를 두지 말자. 기술은 인간을 끌고 가지 않는다. 인간이 기술을 사용할 뿐이다.
인간복제기술을 악용하여 쉬피오가 걱정하는 것 같은 (나는 대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인간성을 폐지하려는 자들은 그 시도 속에서 큰 댓가를 치를 것이다.
“의인의 의도 자신에게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라는 성경의 말씀(에스겔 18장)을 조금 바꾸어 보자.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 속에서 죽을 것이다” 인간복제 기술을 어리석은 방식으로 추구하는 자는 그 과정에서 ‘죽을’ 것이다. 너무 호들갑스러울 필요는 없다.
P.S. 반례를 들었으나 이 반례는 한번 더 생각해 보자는 질문이다. 솔직히 여기 옮기 주장을 완전히 반박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내 배경이 배경인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