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는 인재(人災)인가, 천재(天災)인가?

<서울시에서 간행하는 서울사랑(love.seoul.go.kr)에 실린 원고입니다. 초고이니 아마 편집이 좀 되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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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혹은 전염병)에 걸리면 세계의 적대감을 말그대로 몸소 경험하게 된다. 병에 걸리면 우리 몸이 정말 아프다. 아픈 우리는 죽음을 직감하고 두려워하게 되며, 죽음을 피할 방법을 찾게 된다. 병에 걸린 사람은 사회적으로도 아프다. 감염병이, 메르스가 특히 그랬는데, 어느 사람을, 어떤 경로로 찾아갈지 알아낼 방법이 없기에 병에 걸린 사람은 위험하다. 그래서 병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스스로 거리를 두기도 하고 강제로 격리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은 생각보다 심각하게 아프다. 일상적인 대화와 몸짓이 보통의 생명을 위해 얼마나 필요한지 격리된 사람보다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없는 사회에 생기는 빈 자리는 그 사람의 자리보다 더 크다. 생각해 보자. 만약 이렇게 아픈 사람이 국민의 5%, 10%가 된다면 한 사회가 기능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감염병 대책은 모든 국가의 중대한 책무였고 근대 국가가 수립한 공중보건체계는 위대한 성취였다. 공중보건은 국가가 감염병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역량을 동원하여 감염병을 예방하고 발생한 감염병의 해결을 위해 취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근대국가의 폭력성이나 공중보건조치에 내재한 강제성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감염병이 발생하였는지 감시하고, 병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확산되는지 조사하며(역학조사), 환자를 치료하고, 확산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격리와 소독과 같은 수단을 활용(방역대책)하는 동시에 사회와 소통하고 불필요한 영향을 최소화하는 조치가 공중보건이 하는 활동이다. 이런 활동이 가능하도록 인력과 재정을 확보하고, 그리고 권한의 범위와 한계를 설정해 두는 일도 이 공중보건의 활동에 포함된다.

먼저 작년에 서아프리카를 강타했던 에볼라감염병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에볼라감염병 보도에서 먼저 기억나는 것은 우주복 같은 방호복이고, 그때 우리는 ‘이렇게 무섭구나’, ‘의학기술이 이렇게 정교하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조금 후 에볼라 치료제를 시험한다는 기사와 에볼라 감염병에 대처하기 위해 애쓰다 자신이 감염된 의료인과 그들을 둘러싼 휴먼스토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먼 곳의 이야기여서 이런 기억만 있는 것이다. 에볼라감염병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경험과 이들과 함께 분투했던 공중보건활동가들의 밋밋한 이야기는 우리가 들을 수 없었다. 이들은 치료제도 없이 가장 고전적인 방법(물론 고도로 정교화 된, 그렇지만 역시 고전적인 역학조사와 격리)만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고 설득하며 싸웠다. 에볼라는 아직도 감염자가 생긴다고 하지만, 이제 그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우리는 사스와 신종플루와 같은 병, 에볼라와 비슷한 이야기를 기억한다.

이제 메르스로 돌아가보자. 메르스 대책보다 메르스 감염병으로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메르스 병으로 인한 신체적 아픔, 죽음의 공포와 실제 닥친 죽음, 그리고 뒤따른 사회적 격리를 충분히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접촉자로 격리된 사람도 포함되어야 한다.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공감이 시작이 되어야 한다. 위기앞에서의 공감과 연대의식이 한 사회가 건강하다는 증거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공감할 줄 몰랐다. 신상을 캤고, 넘겨짚어 아이들을 학교에 오지 못하게 했고 희생자를 가해자로 오해했다. 한가지만 더, 의료진을 영웅으로 만들지 말고 존중하는 일이 필요하다. 의료진과 방역당국에 대한 신뢰가 희생이나 대단한 지적 능력, 치료법의 개발 같은 기대가 되지 않아야 한다. 의료진이 정치가 아니라 방역과 공공의 보건만을 판단의 가치로 삼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공간을 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메르스는 천재다. 쉽게 잊고 지내지만 이 세계는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비는 필요한 때 내리지 않고, 혹한과 혹서, 또는 황사 때문에 숨쉬는 일도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다. 병충해는 벼와 과실을 위협하고 숲의 나무를 고사시킨다. 인간은 그래서 조상의 음덕과 전능자의 보살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은 문명의 발전으로 훨씬 안전하게 지내게 된 것처럼, 자기를 직접 책임지고 보호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일은 사회를 보호하는 제도와 수단이 발전한 정도다. 우리 사회의 안전을 보장하는 제도는 정교화되었고 우리 일상에 깊이 파고 들어 깊이 들여다 보지 않으면, 파악되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를 둘러싼 적대적인 세계를 잊어도 될만큼 안전해졌다는 말인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회가 보장하는 안전은 기술과 지식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고 이 구조물이 서있는 기반과 유지하는 뼈대는 불완전한 기술, 지식,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지난 한달여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흔든 메르스 사태가 드러냈다.

재난은 한 사회의 취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제도가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재난은 인재라고 하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메르스는 우리 사회의 취약함을 드러냈고, 국민 모두가 보호받지 못하고 있음도 알게 했다. 이제 메르스가 지나면 우리 사회를 복구하는 일이 남는다. 제도개선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것이다. 이 개선이 우리가 신뢰하는 전문가들에게 자율성의 공간을 부여하도록, 그리고 모든 시민들을 그 보호의 대상으로 삼도록, 그리고 사람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이루어지도록 주의깊게 감시해야 할 것이다.

수술과 절제한 암덩어리

의과대학 수업시간에 HeLa 세포라는 이름을 들은 적 있다. Henrietta라는 이름의 여성에게서 얻은 자궁경부암 세포를 키워내 만든 세포들에 붙인 이름이다. (하나의 세포를 분열시켜 만든 세포들을 세포주, strain이라고 부른다)
헨리에타는 1951년 사망했지만 그녀의 세포는 보통의 세포들과 달리 죽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의학연구에 여러모로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들 연구에는 소아마비 백신 개발도 포함되어 있다.)

산술적으로는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용되었던 이 세포주는 채취과정에서 이후 활용에 대한 동의를 환자 본인에게 받지 않았고(그 시기에야 수술과정에서 얻은 검체 사용에 동의를 얻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결과 인종적/성적 차별까지 포함하여 다양한 비난을 받고 있다.

1. 개인의 유전적 정보가 그 이름과 함께 모두 공개되었다는 것, 그것도 동의를 얻지 않은 상태에서.
2. 많은 연구자들이 이익을 얻고 있으며, HeLa 세포주를 개발한 이들도 이익을 얻었을 것이지만 환자 본인이나 그 가족이 그 이익을 나눠갖지 못했다는 점
3. 이런 잘못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사과나 보상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

2013년 8월 미국 보건원(NIH)과 헨리에타의 가족은 비밀을 보호하고, 이후에 HeLa 세포에서 얻은 추가적인 유전정보 사용시에는 사전에 검토를 하는 등의 해결방안에 합의했다.

이 사건은 기구한 한 여성의 이야기로 소개된 바 있다.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 연구자나 연구를 감독하는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문제가 아니었던 관행이 오래지 않아 추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곤란한 이야기가 된다.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 연구자나 연구기관은, 비틀거리긴 했지만, 용하게 이 문제들을 해결해 왔다는 것이다.

이름을 밝힐 것인가?

메르스 관리에 헛점이 많이 노출된 후, 게다가 현 정부 특유의 윽박지르기까지 거들고 나니 감염병 관리에 정부로부터 기대할 것이 없다는 인식이 퍼지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시민들이 기대를 접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 순간에 크나큰 재앙이 닥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인권, 알권리, 정부의 투명성 같은 (내가 평소에 강조해 왔던) 가치는 감염병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잠시 유보해야 할 것이다. 이런 권리들의 근거가 되는 건강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유는 부담스러우나 반쯤 전시상황인 셈이다. 그래서 지금 시민들이 정부에게 기대해야 할 것은 다른 무엇보다 효율적인 감염병 통제다. 그리고 기꺼이 협조해야 한다.
효과적이고 신속한 치료법이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의료시설 내에서 대증요법을 취해야 할, 신종감염병 대처에서 핵심은 병원체를 (솔직하게 말하면 감염병을 확산시킬 수 있는 환자나 잠복기 등… 사람을) 가두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권위를 잃는 것은 이 사람들을 시설에 (강제로) 모으고, 필요한 치료를 제공하는 일을 심각하게 어렵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다.
권위없는 정부에 현재 시민들은 특이한 요구를 하고 있다. 어느 병원에서 환자가 발생했고, (아마 조금 더 나가면 수와 진료경과까지 요구할까 걱정이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정보를 공개하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쉽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감염병 통제에 도움이 된다면 공개하고, 그렇지 않다면 공개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판단은 방역전문가들이 하라)

공개하든 공개하지 않든 정부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위협을 느낀 시민들이 도움을 받을 경로를 만들어 두라는 것이다. 공공의료기관이 할 일이다. 그리고 1차의료기관 등 의료인의 협력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공공의료기관이 위기에 대처할 용량(capacity)이 되는가? 일선의료인들이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 정부의 눈과 손이 되어 줄까? 의료인들의 신뢰는 어떻게 끌어내려 하나?

이미 이런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프로토콜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껏 잘 해오지 않았나? 이 프로토콜을 시민들과 소통하고 개선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없다면? 그땐 정말 큰일이다.

복제 인간에 대한 딱한 걱정.

알랭 쉬피오(Alain Supiot)의 “법률적 인간의 출현(글항아리, 2015)”을 읽다가…

그는 인간복제를 인격의 개별성과 역사성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이렇게 강력히 비난한다.

“자기복제를 할 수 있다는 기대는 우리를 세대적 고리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다른 성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영원불멸의 삶을 약속함으로써 인간 조건의 세 가지 한계를 일거에 말소시켜버린다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 인간 복제가 언제나 결국에는 파국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상식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는 이 같은 소재가 상상력의 소산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반동적이어서 ‘원본’ 혹은 ‘사본’의 죽음으로 끝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 인간 복제는 여느 기술적 구상과 다르다. 복제는 자연 계 내에서 인간의 행동을 제한하는 한계선을 넓히는 데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한계 자체의 제거를 추구한다. … 자신의 모습을 본떠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은 마침내 가장 어리석은 꿈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pp52~54)

이 ‘상식적’인 주장은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딱하게 읽혔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면하는 장치로 생식을 통해 다음 세대를 돌보며, 이 생식을 이성의 도움을 통해 얻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인간복제에 대한 비판을 끌어내는 과정의 문제가 있다.

일단 인간복제가 두 존재 사이의 관계 문제라는 사실에서 시작해 보자. 그리고 성체와 복제된 개체(아마도 배아,태아,영아 중 하나겠지) 사이의 관계에서 권력이 기울어 진다는 사실도 확인해 두자. 성체는 어떤 목적을 두고 복제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복제 행위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동기에서 이루어지는가? 둘러서 이야기 하지 말자. 모든 복제연구와 복제 시도가 영생하려고 하는 것인가? 답은 비교적 분명하다. 아니오.

혹, 영생하려는 동기를 인정해 보자. 그러면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성을 폐지하려는 시도가 아닌지 의심해야 할 것이다. 이게 흐름이다. 하지만, 정말 한계는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주는가? 쉬피오는 기꺼이 그렇다고 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니까.

그렇지만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인간성을 파괴하는가? 인간의 본래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타인과의 관계성은 중요한 요소이긴 하다. 그리고 관계성은 부분적으로 한계와 관련된 현상- 죽음, 생식,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는 생각은 쉬피오의 생각일뿐이다. 예를 들어 우정이라는 관계는 죽음, 생식, 의존성에서 자유로운 관계다. 그리고 이 관계는 거듭 칭송되어 왔다.

한편 쉬피오의 논의에는  한계가 없어져,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 존재가 된 인간이 폭주하게 될 것이라는 염려가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기술이 가능해 진다고 인간이 변화될 것이라는 예측은 지금껏 틀려왔다. 시험관 아기는 인간의 오만(휴브리스)의 상징처럼 비난받았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기술로 활용되고 있다. 예컨대 기술에 너무 심각한 혐의를 두지 말자. 기술은 인간을 끌고 가지 않는다. 인간이 기술을 사용할 뿐이다.

인간복제기술을 악용하여 쉬피오가 걱정하는 것 같은 (나는 대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인간성을 폐지하려는 자들은 그 시도 속에서 큰 댓가를 치를 것이다.

“의인의 의도 자신에게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라는 성경의 말씀(에스겔 18장)을 조금 바꾸어 보자.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 속에서 죽을 것이다” 인간복제 기술을 어리석은 방식으로 추구하는 자는 그 과정에서 ‘죽을’ 것이다. 너무 호들갑스러울 필요는 없다.

P.S. 반례를 들었으나 이 반례는 한번 더 생각해 보자는 질문이다. 솔직히 여기 옮기 주장을 완전히 반박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내 배경이 배경인지라.

사전의료의향서

http://flowvella.com/s/34zc

우리나라는 아직 치료받는 환자의 결정권을 (절대는 아니겠으나)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2010년부터 노인이 치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사전의료의향서가 소개되었지만 혼란은 여전하다.

우선 서식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다. 급식거부(최근 학계에서는 VSED voluntary stopping of  eating and drinking이라는 표제어로 논쟁의 대상이 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분노하는 이들이 있고, 미국 기준으로 생전유언과 대리인지정이 한 서류 안에 들어오면서 혼란스럽다는 지적도 있다 (나는 이게 무슨 문제인가 싶다)

한편으로는 서식을 작성하고 활용하는 과정에 대한 우려가 있다 (이것은 상당히 정당하다). 작성 과정에서 서식의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는가 하는 가독성 문제, 가족과의 의사소통 문제, 작성해 놓아도 무시당하는 의료현장의 문제 등…

법이 어떻게 제정될지, 현재 형식과 얼마나 다른 서식이 등장할지, 기존의 작성분은 어떻게 처리 될지, 그리고 지금 여기저기 등장하는 강사/서식 등은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앞으로도 할 일은 많다.

무의미한 치료와 비용 문제

호주 의사협회는 무의미한 치료(futility care)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 문제는 죽어가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의사들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호주의사협회 회장의 인터뷰는 비용 문제가 무의미한 치료문제의 중요한 고려 대상임을 밝혔다. 심지어 의료보장(medicare)를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비용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정책 과정에서 비용 문제는 외면 받고 있다. ‘돈’을 천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비용 때문에 치료를 중단해야 한다고 허용하게 되면 한없이 굴러 떨어질 것이라고 직감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무의미한 치료의 중단과 의료보장의 문제를 연계해서 생각하게 될 때 “돈이 없어 치료를 중단하”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핵심은 무의미하다는 개념이다.자꾸 반복하지만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혹은 중단해야 한다)는 말은 돈이 없으면 아무 치료라도 중단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의사들 중에는 일단 허용하면 가족들이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치료를 중단해달라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중요한 고려 사항은 그 요구가 얼마나 자주, 얼마나 심각하게 제기되느냐 하는 것이다.
환자 측에서는 치료받을 수 있는데 중단해야 한다고 강요받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치료해줄 의사는, 사실, 많다.

비용문제는 무의미한 치료 중단에 있어 부수적인 문제다. 물론 비용을 고려하는 입장에서는 기대할만한 효과이고, 비용을 고려하는 입장에 있는 정부가 신뢰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의료비가 심각한 부담인 한국 사회에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부디 정확하게 설명하기를, 신뢰를 얻어내길.

PS. 2012년에 냈던 아주 거친 추계에서는 무의미한 치료로 지출되는 보험 지출이 연간 3천억원 안팎으로 나왔다. 최대로 쳐도 5천억원 정도다. 두 가지 질문이 생긴다.

1.  이 정도를 우리 사회가 정말 부담할 여력이 없나?
2. 이 금액을 지출하지 않고 입원 환자 간병비 부담을 줄이면 안될까?

가능하지만, 너무 비싸 닿을 수 없는 치료

오늘자 Reuter 신문 기사

90년대 유전자 치료가 가능해져서 단번에 병을 없앨 수 있으리라고 과학자들이 장담했다. 그리고 지난 20여년 동안 더 이상 진보는 없었다 (U Penn에서는 제시 겔싱어 사건이 있었고, 프랑스에선 유전자 치료를 받은 아이들에게 백혈병이 발생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연구는 계속 되었고 드디어 유럽에선 Glybera가 유전자 치료제로 시판되었다. 진짜 유전자 치료가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오늘자 로이터 신문 기사에선 그 가격이 150만 달러 가까울 것이라고 한다. 우리돈 17억원. 우리 건강보험이 이 비용을 지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전자 치료와 평생 동안 받을 치료제 비용만 비교할 수도 없다. 이 치료제는 너무 비싸다, 공공재원으로 부담하기엔.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희귀난치병은 건강보험이 아니라 다른 재원으로 지원한다. 그래서 더 부족한 자원을 받고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삶의 질도 계산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질병으로 인한 장애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환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지원해야 하나? 그런 계산을 할 수 있는가? 그정도로 우리는 솔직하고 냉정하고 ‘잔인할’ 수 있는가? 구조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할 사안은 아닐까?

우리 사회가 이들 소외된 집단에 손을 내미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제도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안녕이라고 말할 때까지”

Susan Spencer-Wendell은 민완기자로 삶의 정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이가 갑작스럽게 루게릭병(ALS)을 진단받고 병에 대처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 “안녕이라고 말할 때까지(문학동네, 2014)”다.

이 책을 가지고 했던 학생들의 토론 발표를 들으면서, 솔직히 걱정하면서 들었지만, 많이 배웠다. 배운 것들..

1. 환자는 가족에게 받기만 하는가?
전통적인 환자노릇과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2. SNS와 질병과 문화
SNS에 투병기가 오르는 일은 별로 없다. 이상하게도… 블로그에는 투병기가 올라오지만 타인에게, 그것도 어느정도 구체적인 타인에게는 질병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가?

3.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
아프든 건강하든 사람은 균형을 잡고 살아가야 한다. 균형을 잃기 쉬운 게 아픈 사람이긴 하다. 이야기(narrative)라는 차원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질서(order)가 필요하고, 질서는 사건의 의미(meaning)와 직결된다. 맥락을 확인함으로써 의미를 찾고, 의미를 통해 질서를 회복하는 일종의 순환 과정을 환자는 경험해야 한다.

4. 내 입으로 나의 병을 직접 인정하는 일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내게 맞춰달라는 이기적인 요구일수도 도움의 요청일수도 있다.

5. 혼자 앓지 않는다
가족이나 친구들도 함께 앓는다. 누가 병에 관해 이야기 하는가에 따라 매우 다른 이야기가 될 수는 있다.

6. 살아온 방식대로 아프고, 죽는다
학생들은 지난 주에 보았던 Stopped on Track이라는 영화의 주인공과 수전을 비교했다. 사람은 병에 저항한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써서. 그 자산이 적은 사람이 힘겨운 것은 당연한 일.

7. 우리는 생생한 삶을 원한다
아픈 사람의 경험은 제한된다. 제약을 뛰어 넘으려면 혹시라도 최신의 치료를 거부해야 할 때가 생긴다. 분명한 자기 인식을 유지하면서 삶을 마치는 일은, 추구할 가치가 충분한 일이다. 의사는 이런 과정에 조금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학생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을 발견했다. 기분이 좋다.

무의미한 치료 논쟁

9월 초, 호주의사협회가 임종기의료(end of life care)와 사전의료계획(advance care planning)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오래 전부터 논의를 진행해온 국가 중 하나지만 호주에서도 이 문제는 여전히 논의를 필요로 하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무의미한 치료, 치료의 무익함(medical futility)을 이 성명서에서는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임종기 의료에서 의미있는 수명의 연장의 기회가 극히 작거나 없는, 또는 최선의 경우라 해도 환자의 죽음은 회피할 수 없고 아주 단기간만 미룰 수 있는 치료는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치료로 간주할 수 있다”

(In end of life care, medically futile treatment can be considered to be treatment that gives no, or an extremely small, chance of meaningful prolongation of survival and, at best, can only briefly delay the inevitable death of the patient.)”

최선을 다 하고 나서 우리가 할 일은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번 성명에는 그래서 의사결정능력 (decision-making capacity), 사전의료계획(advance care planning), 애도(bereavement) 와 같은 요소들도 함께 언급되어 있다.

이런 입장 확인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는 치료요구와 의료진의 고민을 보여준다. 아마 이런 고민이 없다고 하면 그게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혹시 우리 법은 이런 고민할 기회를 제거하려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된다.

분열적인 죽음 판정

지금 제네바에서 WHO Expert Consultation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다. WHO가 캐나다의 지원을 받아 조직한 그룹 내에서 지난 몇 년간 논의되어왔던 “죽음의 판정절차”를 최종적으로 다듬고 결정짓기 위한 자문회의였다.

몇 차례 회의 때마다 반복된 죽음의 정의와 관련된 “윤리적, 법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개최측은 처음부터 이번 회의가 “임상적, 과학적” 측면에 국한된 것이라고 강조해왔는데, 그렇게 논의를 좁힌 결과일지, 이번 회의는 수월하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심장사 진단 과정에서 반드시 충족해야 할 임상적/진단적 기준을 먼저 논의했고, 이어서 논란의 핵심에 있는 뇌사 진단 과정의 문제를 이야기 했다.

심장사는 비교적 간단할 수 있었던 것이 어느 사회라도 심폐기능정지가 죽음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국제 회의까지 거쳐야 했던 것은 ECG, intra-arterial (BP) monitor, ecocardigram을 활용할 수 없는 남반구 의료시설에서도 심폐사 진단이 선진국과 동일한 최종적인 판단이 되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임상적인 진단으로 사망을 확진할 수 있으나, 가능하면 진단기구를 활용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뇌사는 그렇지 않다. 이미 뇌사라는 것 자체가 기술의존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호흡보조장치와 다양한 신체계측, 약물 및 보조적 조치가 없으면 이미 뇌사라는 현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의 경우라도 진단 과정에서 CT나 Transcranial doppler 등의 진단 도구 사용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특히 CT angio 검사 없이도 뇌사판정이 가능하도록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애썼다. 결국 여기서도 임상적 진단과 보조적 진단검사를 구분하고, 필요한 조건 등을 제시하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런 진단 기준은 우리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제시하고 있는 뇌사판정기준과 상충하거나 하지는 않아 필자가 크게 목소리를 높일 필요는 없었다. 우리 법은, 우리나라 의료서비스가 심각하게 기술의존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제시된 기준에 못미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합의가 가능했던 것은 모호한 표현을 최대한 줄이자, 임상적 내용에 집중하자는 초기 제약이 크게 영향을 미쳤고, 참석자들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로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불편했던 것은, 사석에서 주최측이 한 말처럼, 일본(여기에는 한국도 포함된다는 불편한 진실)이 말썽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법은 1990년대 말 뇌사자 장기공여를 합법화 하기 위해 급히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장기이식을 위한 뇌사판정만을 인정하는 괴상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정말 괴상하다. 논리적으로 우리 법 x체계는 뇌사자의 장기를 착취하는 구조다. 죽지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치고 장기를 가족의 허락을 받아 떼내는 이런 괴상한 논리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나는 참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3000명 가까운 뇌사자가 집중치료를 받는다는 연구 조사가 있다(무의미한 치료라는 논쟁적 표현을 피하더라도 이 환자들은 고통받고 있다. 분명히). 뇌사 인정문제는 장기이식과 무관한 문제다. 이걸 구별하려 하지 않는 우리의 게으름을 부끄러워 하자. 어떻게든 사망에 관한 법적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 추가

이번 회의 내내 몇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과학은 윤리를 앞서갈 수 있을까? 보통 윤리가 과학의 한계를 짓는다고들 하지만, 이번 회의는 그 반대의 가능성을 보였다. 동시에 과학적 논의가 윤리적-철학적 논의를 피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회의 주최자들의 나이브함도 솔직히 – 그러나 여기 참석한 임상가 중 이런 회의적인 태도는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