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 인간에 대한 딱한 걱정.

알랭 쉬피오(Alain Supiot)의 “법률적 인간의 출현(글항아리, 2015)”을 읽다가…

그는 인간복제를 인격의 개별성과 역사성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이렇게 강력히 비난한다.

“자기복제를 할 수 있다는 기대는 우리를 세대적 고리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다른 성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영원불멸의 삶을 약속함으로써 인간 조건의 세 가지 한계를 일거에 말소시켜버린다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 인간 복제가 언제나 결국에는 파국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상식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는 이 같은 소재가 상상력의 소산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반동적이어서 ‘원본’ 혹은 ‘사본’의 죽음으로 끝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 인간 복제는 여느 기술적 구상과 다르다. 복제는 자연 계 내에서 인간의 행동을 제한하는 한계선을 넓히는 데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한계 자체의 제거를 추구한다. … 자신의 모습을 본떠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은 마침내 가장 어리석은 꿈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pp52~54)

이 ‘상식적’인 주장은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딱하게 읽혔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면하는 장치로 생식을 통해 다음 세대를 돌보며, 이 생식을 이성의 도움을 통해 얻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인간복제에 대한 비판을 끌어내는 과정의 문제가 있다.

일단 인간복제가 두 존재 사이의 관계 문제라는 사실에서 시작해 보자. 그리고 성체와 복제된 개체(아마도 배아,태아,영아 중 하나겠지) 사이의 관계에서 권력이 기울어 진다는 사실도 확인해 두자. 성체는 어떤 목적을 두고 복제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복제 행위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동기에서 이루어지는가? 둘러서 이야기 하지 말자. 모든 복제연구와 복제 시도가 영생하려고 하는 것인가? 답은 비교적 분명하다. 아니오.

혹, 영생하려는 동기를 인정해 보자. 그러면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성을 폐지하려는 시도가 아닌지 의심해야 할 것이다. 이게 흐름이다. 하지만, 정말 한계는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주는가? 쉬피오는 기꺼이 그렇다고 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니까.

그렇지만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인간성을 파괴하는가? 인간의 본래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타인과의 관계성은 중요한 요소이긴 하다. 그리고 관계성은 부분적으로 한계와 관련된 현상- 죽음, 생식,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는 생각은 쉬피오의 생각일뿐이다. 예를 들어 우정이라는 관계는 죽음, 생식, 의존성에서 자유로운 관계다. 그리고 이 관계는 거듭 칭송되어 왔다.

한편 쉬피오의 논의에는  한계가 없어져,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 존재가 된 인간이 폭주하게 될 것이라는 염려가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기술이 가능해 진다고 인간이 변화될 것이라는 예측은 지금껏 틀려왔다. 시험관 아기는 인간의 오만(휴브리스)의 상징처럼 비난받았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기술로 활용되고 있다. 예컨대 기술에 너무 심각한 혐의를 두지 말자. 기술은 인간을 끌고 가지 않는다. 인간이 기술을 사용할 뿐이다.

인간복제기술을 악용하여 쉬피오가 걱정하는 것 같은 (나는 대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인간성을 폐지하려는 자들은 그 시도 속에서 큰 댓가를 치를 것이다.

“의인의 의도 자신에게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라는 성경의 말씀(에스겔 18장)을 조금 바꾸어 보자.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 속에서 죽을 것이다” 인간복제 기술을 어리석은 방식으로 추구하는 자는 그 과정에서 ‘죽을’ 것이다. 너무 호들갑스러울 필요는 없다.

P.S. 반례를 들었으나 이 반례는 한번 더 생각해 보자는 질문이다. 솔직히 여기 옮기 주장을 완전히 반박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내 배경이 배경인지라.

사전의료의향서

http://flowvella.com/s/34zc

우리나라는 아직 치료받는 환자의 결정권을 (절대는 아니겠으나)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2010년부터 노인이 치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사전의료의향서가 소개되었지만 혼란은 여전하다.

우선 서식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다. 급식거부(최근 학계에서는 VSED voluntary stopping of  eating and drinking이라는 표제어로 논쟁의 대상이 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분노하는 이들이 있고, 미국 기준으로 생전유언과 대리인지정이 한 서류 안에 들어오면서 혼란스럽다는 지적도 있다 (나는 이게 무슨 문제인가 싶다)

한편으로는 서식을 작성하고 활용하는 과정에 대한 우려가 있다 (이것은 상당히 정당하다). 작성 과정에서 서식의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는가 하는 가독성 문제, 가족과의 의사소통 문제, 작성해 놓아도 무시당하는 의료현장의 문제 등…

법이 어떻게 제정될지, 현재 형식과 얼마나 다른 서식이 등장할지, 기존의 작성분은 어떻게 처리 될지, 그리고 지금 여기저기 등장하는 강사/서식 등은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앞으로도 할 일은 많다.

무의미한 치료와 비용 문제

호주 의사협회는 무의미한 치료(futility care)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 문제는 죽어가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의사들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호주의사협회 회장의 인터뷰는 비용 문제가 무의미한 치료문제의 중요한 고려 대상임을 밝혔다. 심지어 의료보장(medicare)를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비용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정책 과정에서 비용 문제는 외면 받고 있다. ‘돈’을 천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비용 때문에 치료를 중단해야 한다고 허용하게 되면 한없이 굴러 떨어질 것이라고 직감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무의미한 치료의 중단과 의료보장의 문제를 연계해서 생각하게 될 때 “돈이 없어 치료를 중단하”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핵심은 무의미하다는 개념이다.자꾸 반복하지만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혹은 중단해야 한다)는 말은 돈이 없으면 아무 치료라도 중단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의사들 중에는 일단 허용하면 가족들이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치료를 중단해달라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중요한 고려 사항은 그 요구가 얼마나 자주, 얼마나 심각하게 제기되느냐 하는 것이다.
환자 측에서는 치료받을 수 있는데 중단해야 한다고 강요받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치료해줄 의사는, 사실, 많다.

비용문제는 무의미한 치료 중단에 있어 부수적인 문제다. 물론 비용을 고려하는 입장에서는 기대할만한 효과이고, 비용을 고려하는 입장에 있는 정부가 신뢰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의료비가 심각한 부담인 한국 사회에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부디 정확하게 설명하기를, 신뢰를 얻어내길.

PS. 2012년에 냈던 아주 거친 추계에서는 무의미한 치료로 지출되는 보험 지출이 연간 3천억원 안팎으로 나왔다. 최대로 쳐도 5천억원 정도다. 두 가지 질문이 생긴다.

1.  이 정도를 우리 사회가 정말 부담할 여력이 없나?
2. 이 금액을 지출하지 않고 입원 환자 간병비 부담을 줄이면 안될까?

가능하지만, 너무 비싸 닿을 수 없는 치료

오늘자 Reuter 신문 기사

90년대 유전자 치료가 가능해져서 단번에 병을 없앨 수 있으리라고 과학자들이 장담했다. 그리고 지난 20여년 동안 더 이상 진보는 없었다 (U Penn에서는 제시 겔싱어 사건이 있었고, 프랑스에선 유전자 치료를 받은 아이들에게 백혈병이 발생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연구는 계속 되었고 드디어 유럽에선 Glybera가 유전자 치료제로 시판되었다. 진짜 유전자 치료가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오늘자 로이터 신문 기사에선 그 가격이 150만 달러 가까울 것이라고 한다. 우리돈 17억원. 우리 건강보험이 이 비용을 지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전자 치료와 평생 동안 받을 치료제 비용만 비교할 수도 없다. 이 치료제는 너무 비싸다, 공공재원으로 부담하기엔.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희귀난치병은 건강보험이 아니라 다른 재원으로 지원한다. 그래서 더 부족한 자원을 받고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삶의 질도 계산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질병으로 인한 장애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환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지원해야 하나? 그런 계산을 할 수 있는가? 그정도로 우리는 솔직하고 냉정하고 ‘잔인할’ 수 있는가? 구조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할 사안은 아닐까?

우리 사회가 이들 소외된 집단에 손을 내미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제도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안녕이라고 말할 때까지”

Susan Spencer-Wendell은 민완기자로 삶의 정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이가 갑작스럽게 루게릭병(ALS)을 진단받고 병에 대처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 “안녕이라고 말할 때까지(문학동네, 2014)”다.

이 책을 가지고 했던 학생들의 토론 발표를 들으면서, 솔직히 걱정하면서 들었지만, 많이 배웠다. 배운 것들..

1. 환자는 가족에게 받기만 하는가?
전통적인 환자노릇과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2. SNS와 질병과 문화
SNS에 투병기가 오르는 일은 별로 없다. 이상하게도… 블로그에는 투병기가 올라오지만 타인에게, 그것도 어느정도 구체적인 타인에게는 질병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가?

3.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
아프든 건강하든 사람은 균형을 잡고 살아가야 한다. 균형을 잃기 쉬운 게 아픈 사람이긴 하다. 이야기(narrative)라는 차원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질서(order)가 필요하고, 질서는 사건의 의미(meaning)와 직결된다. 맥락을 확인함으로써 의미를 찾고, 의미를 통해 질서를 회복하는 일종의 순환 과정을 환자는 경험해야 한다.

4. 내 입으로 나의 병을 직접 인정하는 일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내게 맞춰달라는 이기적인 요구일수도 도움의 요청일수도 있다.

5. 혼자 앓지 않는다
가족이나 친구들도 함께 앓는다. 누가 병에 관해 이야기 하는가에 따라 매우 다른 이야기가 될 수는 있다.

6. 살아온 방식대로 아프고, 죽는다
학생들은 지난 주에 보았던 Stopped on Track이라는 영화의 주인공과 수전을 비교했다. 사람은 병에 저항한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써서. 그 자산이 적은 사람이 힘겨운 것은 당연한 일.

7. 우리는 생생한 삶을 원한다
아픈 사람의 경험은 제한된다. 제약을 뛰어 넘으려면 혹시라도 최신의 치료를 거부해야 할 때가 생긴다. 분명한 자기 인식을 유지하면서 삶을 마치는 일은, 추구할 가치가 충분한 일이다. 의사는 이런 과정에 조금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학생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을 발견했다. 기분이 좋다.

무의미한 치료 논쟁

9월 초, 호주의사협회가 임종기의료(end of life care)와 사전의료계획(advance care planning)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오래 전부터 논의를 진행해온 국가 중 하나지만 호주에서도 이 문제는 여전히 논의를 필요로 하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무의미한 치료, 치료의 무익함(medical futility)을 이 성명서에서는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임종기 의료에서 의미있는 수명의 연장의 기회가 극히 작거나 없는, 또는 최선의 경우라 해도 환자의 죽음은 회피할 수 없고 아주 단기간만 미룰 수 있는 치료는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치료로 간주할 수 있다”

(In end of life care, medically futile treatment can be considered to be treatment that gives no, or an extremely small, chance of meaningful prolongation of survival and, at best, can only briefly delay the inevitable death of the patient.)”

최선을 다 하고 나서 우리가 할 일은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번 성명에는 그래서 의사결정능력 (decision-making capacity), 사전의료계획(advance care planning), 애도(bereavement) 와 같은 요소들도 함께 언급되어 있다.

이런 입장 확인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는 치료요구와 의료진의 고민을 보여준다. 아마 이런 고민이 없다고 하면 그게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혹시 우리 법은 이런 고민할 기회를 제거하려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된다.

분열적인 죽음 판정

지금 제네바에서 WHO Expert Consultation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다. WHO가 캐나다의 지원을 받아 조직한 그룹 내에서 지난 몇 년간 논의되어왔던 “죽음의 판정절차”를 최종적으로 다듬고 결정짓기 위한 자문회의였다.

몇 차례 회의 때마다 반복된 죽음의 정의와 관련된 “윤리적, 법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개최측은 처음부터 이번 회의가 “임상적, 과학적” 측면에 국한된 것이라고 강조해왔는데, 그렇게 논의를 좁힌 결과일지, 이번 회의는 수월하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심장사 진단 과정에서 반드시 충족해야 할 임상적/진단적 기준을 먼저 논의했고, 이어서 논란의 핵심에 있는 뇌사 진단 과정의 문제를 이야기 했다.

심장사는 비교적 간단할 수 있었던 것이 어느 사회라도 심폐기능정지가 죽음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국제 회의까지 거쳐야 했던 것은 ECG, intra-arterial (BP) monitor, ecocardigram을 활용할 수 없는 남반구 의료시설에서도 심폐사 진단이 선진국과 동일한 최종적인 판단이 되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임상적인 진단으로 사망을 확진할 수 있으나, 가능하면 진단기구를 활용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뇌사는 그렇지 않다. 이미 뇌사라는 것 자체가 기술의존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호흡보조장치와 다양한 신체계측, 약물 및 보조적 조치가 없으면 이미 뇌사라는 현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의 경우라도 진단 과정에서 CT나 Transcranial doppler 등의 진단 도구 사용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특히 CT angio 검사 없이도 뇌사판정이 가능하도록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애썼다. 결국 여기서도 임상적 진단과 보조적 진단검사를 구분하고, 필요한 조건 등을 제시하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런 진단 기준은 우리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제시하고 있는 뇌사판정기준과 상충하거나 하지는 않아 필자가 크게 목소리를 높일 필요는 없었다. 우리 법은, 우리나라 의료서비스가 심각하게 기술의존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제시된 기준에 못미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합의가 가능했던 것은 모호한 표현을 최대한 줄이자, 임상적 내용에 집중하자는 초기 제약이 크게 영향을 미쳤고, 참석자들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로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불편했던 것은, 사석에서 주최측이 한 말처럼, 일본(여기에는 한국도 포함된다는 불편한 진실)이 말썽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법은 1990년대 말 뇌사자 장기공여를 합법화 하기 위해 급히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장기이식을 위한 뇌사판정만을 인정하는 괴상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정말 괴상하다. 논리적으로 우리 법 x체계는 뇌사자의 장기를 착취하는 구조다. 죽지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치고 장기를 가족의 허락을 받아 떼내는 이런 괴상한 논리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나는 참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3000명 가까운 뇌사자가 집중치료를 받는다는 연구 조사가 있다(무의미한 치료라는 논쟁적 표현을 피하더라도 이 환자들은 고통받고 있다. 분명히). 뇌사 인정문제는 장기이식과 무관한 문제다. 이걸 구별하려 하지 않는 우리의 게으름을 부끄러워 하자. 어떻게든 사망에 관한 법적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 추가

이번 회의 내내 몇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과학은 윤리를 앞서갈 수 있을까? 보통 윤리가 과학의 한계를 짓는다고들 하지만, 이번 회의는 그 반대의 가능성을 보였다. 동시에 과학적 논의가 윤리적-철학적 논의를 피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회의 주최자들의 나이브함도 솔직히 – 그러나 여기 참석한 임상가 중 이런 회의적인 태도는 찾을 수 없었다.

Ebola Ethics

이번 유행이 서부 아프리카 몇 개 국가에서 확산되다 끝날지, 아니면 더 많은 나라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으나, 의료윤리학자로서 몇 가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1. global ethics, or ecological perspective

– HIV, Ebola 모두 환경 파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발견된지 40년이 지나도록 (HIV 전에 발견되었다) 치료나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서구 제약산업/의학연구의 관심의 폭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자국민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는 질병만이 연구의 대상이 된다.  과연 제약산업/연구자의 책임은 어디까지 일까? 이들에게 Ebola 치료법을 개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가 아니었을까? 

-물론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부담을 스스로 지는 태도도 요구된다…만, 현실정치는 조금 다르긴 하다. 

 

2. quarantine, national security and public health governance

– 병에는 국경이 없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있고, 당연히 환자들에게도 있다. 치료법이 없는 병에 걸린 감염성질환자가 국경을 넘어와서 난민처럼 지내도록 허용하는 것이 윤리적인가? 정당화 할 수 있는 제한이 가능한가?  

– 심지어 이 병은 잠복기도 21일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단 입국을 허용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가? 난민을? 게다가 아프리카 국가들이? 

– 이들 국가에서 온 사람들을 정상인으로 간주해야 하나? 최악의 경우 이들을 ‘독’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국제 분쟁이나 제노사이드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누구 말대로 가장 밀도가 높은 지역에 핵이라도 떨어뜨려야 하나? 그렇게 안전해지면 좋을까?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전략은 어떤 극단적인 경우에 사용할 수 있을까? 
가능한 조건은, 1) 다른 방법이 없다, 2)효과가 확실하다, 3)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 4)최소한 책임있는 사람들의 (기록에 남은) 논의가 있었다 정도가 아닐까? 

 

3. use of developing drugs and benefit-risk balancing

– 지금 주목받는 치료제는, 재미있는게, 20세기 초에 잠시 반짝했던 단일항체요법과 관계가 있는 것이란다. 

– 지금껏 무시했던 병의 확산에 깜짝 놀라 치료제를 사용하기는 하는데, 이런 개발단계의 약물을 치료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기존의 약물개발원칙을 무시하는 위험한 행동이 아닌가하는 질문을 하는 어의없는 사람도 있다. 

– 중요한 문제는 정말 급한 사람에게, 그리고 효과를 크게 볼 사람에게 약물이 전달되도록 보장할 방법이 있느냐는 것인데, 솔직히 암담하다. 시민권이 문제가 될 거다.

 

4. professional ethics

– 미국인 환자가 발생했을 때 국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환송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치료법이 효과를 볼것이란 판단과 함께, 이들이 구호활동 중이었다는 것이었다. 

–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일에 애쓰는 프로페셔널은 사회가 보호한다(아니,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 국가에서 의사, 간호사, 경찰이 위험을 핑계로 진료를 거부하고, 위치를 이탈하고, 그런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무조건적으로 비난해야 하나? 

 

5. solidarity & quarantine : 자국민이 외국에서 발병했을 때

– 질병관리본부는 외국에서 에볼라 환자가 발생하면 그냥 거기 있도록 한다는 방침을 알렸다. (바보같이) 한국엔 4급 방역시설도, 마땅한 치료제도, 없으니 그게 현실적일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의 정치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자. 

–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고전정치학). 그런데 자국민이 외국에서 치명적인 질환에 걸렸음에도 무시한다는 것은 국가의 존립기반을 위협하는 것이다. 물론 가지말라는 곳에 가서 납치되거나(아프가니스탄), 감염된 경우라면 이들은 비난을 받겠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보호할 의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그런 상황에서도 국민을 구하고 (그다음에 벌을 주거나 하면된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런 게 누가 좋아하는 국격이다) 국민은 자신의 행위가 국가와 동료 시민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이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책무다.

– 그리고 그 책무는 시민사회가 정권을 압박해서 실현시켜야 하는 거다. 

병원은 자선과 환대의 공간이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원장이 중앙일간지에 기고한 기사에 당혹감을 느끼다. (원문: 병원은 꼭 치료만 하는 곳은 아니다)

의료법인의 부대 사업과 관련해서 영리화 논쟁이 벌어지는 중에 “보사연” 원장이 던진 sh*t 덩어리. 

그이는 hospital과 hotel이 ho- 라는 같은 발음을 가진 것에서 힌트를 얻었나보다. 그래서 병원도 호텔처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편다. 배운 사람, 책임있는 사람이 한 말이 이 수준이라는 것이 한심할뿐이다. 

– 프랑스 파리에는 중세에 (7세기) 지어진 병원(행려병자 수용소지만)이 Hotel Dieu (하느님의 집)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실 프랑스 여러지역에서 이 이름을 가진 병원이 지어졌다.  병원의 어원이 ‘호텔’인지 모르겠으나 병원이 원래 병든 이들을 돌보는 곳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기독교적 의미에서 자선(charity)과 환대(hospitality)가 병원의 본질이지 스파와 건강식품이 병원의 본질은 아니었다. 
파리에 있는 Hotel- Dieu 위키피디아에서

파리에 있는 Hotel- Dieu 위키피디아에서

로또 임상이라니…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아는 분이 메일을 보내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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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의견을 구할께요.

아래 기사와 같이 소위 ‘로또 임상시험’의 경우,

임상시험대상자(피험자)를 어떻게 모집해야 할까요?

 

벨몬트 원칙에 따르면 임상시험대상자를 선정할 때 ‘정의의 원칙’을 따라서

인종, 재산, 교육, 친소관계 등과 무관하게 공정하게 선발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 의사들이 잘 아는 가족이나 환자들을 우선적으로 인롤 시킬 가능성이 있고,

그 과정에서 힘 없는 사람이 배제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그리고 만약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큰 부작용이 발생할 경우

오히려 이렇게 시험대상자로 선정된 사람들이 제대로 항의하기도 어려운

취약한 시험대상자(취약한 피험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

 

고견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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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답했다.

재미있는 주제를 주셨습니다.
C형 간염 치료제는 아니지만 비슷한 문제들이 이미 개발도상국에서는 고질적인 문제가 되어왔습니다.
사하라 이남의 극빈층을 대상으로 선진국이 임상시험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문제들이 지적되었는데,
1. IMF 등의 요구로 보건의료비 지출을 줄여서 공공보건을 포함한 보건의료가 붕괴된 지역에, 임상시험을 통해서 ‘치료제 (항생제가 주입니다)’가 공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적하신 대로 이 임상시험 약물이 연구자와 관련있는 사람들에게 치료제 처럼 공급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정부가 보건의료체계에 투자하지 않게 된다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2. 이미 알려진 치료제가 있는데도 이들 지역에는 시험약이 제공되고, 결국 피해를 입게 되기도 합니다 (2000년대 중반 시험약물이 HIV 관련 설사 치료에 공급되었는데, 이미 알려진 치료제가 있음에도 효과를 확인할수 없는 이들 약물로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 이 결과는 JAMA에 실렸지요. 사망자는… 그저 임상시험 대상이었구요)
우리나라에서도 고가의 치료제가 제공되니 비슷한 상황을 염려하게 되는군요.
임상시험이라고 하는데, 외국에서는 치료제로 시판 허가를 받은 약물인가 봅니다. 국내 2상, 혹은 3상 시험일 가능성이 높네요. 국내 시판을 목표로 절차를 밟아가는 중이군요.
이런 경우는, 솔직히 일종의 샘플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원칙적으로는 임상시험이고,
이중맹검을 하겠지요. 이렇게 임상시험을 진행한다고 하면 누가 시험군/대조군에 속하게 되는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물론 문제는 배제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경우입니다만, 이론적으로야 이 사람들 피해입은 것 없습니다.
이런 경우 임상시험의 원칙을 적용해야겠지요.
1. 임상시험을 진행하다가 혜택/피해가 통계적으로 분명해진다면 즉시 그 사실을 알리고 효과가 있거나/해가 없는 치료법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 원칙이야 연구계획서에 항상 들어있으니 준수를 요구하면 됩니다. (연구자와 스폰서는 이 부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겠지요. 3상이라면 부작용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할테니까)
2. 대조군시험이 아니라 사례연구로 진행하도록 연구 모델을 바꾸는 것도 가능합니다만… 이렇게 진행될 수는 없겠지요 (알량한 논문도 안나올테고, 식약처 승인도 어려울테고)
3. 대조군/시험군 배정에 대한 공정성을 확보하도록 모델을 잘 검토해야 합니다.
4. 이렇게 치료효과가 분명하고, 이 약물 외에 다른 치료법이 없는 환자군은 말씀대로 취약한 피험자입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고가의 치료제를 제공하는 것은 유인 또는 강압에 해당하구요. 언론이 이렇게 떠들었으니 피험자 모집도 아주 끝내주게 된 상황일 겁니다. (이미 온라인 커뮤니티는 시끄러웠겠군요). 이런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연구계획서 심의를 시행하도록 해야할텐데, 아주 조심스럽습니다만, 이런 종류의 다기관 임상은 개별IRB가 아니라 공용IRB의 심의를 거치도록 하는 것도 한가지 안전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이해상충이나 불필요한 압력을 피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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